가까운 친구들에게 몇 차례를 권했어도 예상만한 열렬한 반응은 못얻었지만, 나에게만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전율을 주는 걸작이 있다.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Vendredi, Ou Les Limbes du Pasifique>. 관점의 전환, 중심성의 해체를 생각하게 해준 프랑스 소설이다. 문명을 상징하는 백인남성 로빈슨 크로우스 대신에, 원작에서는 목소리를 빼앗겼던 방드르디를 중심에 복권시킨다.
<행복한 책>을 꼬마와 읽으면서 내내, 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생각났다. <행복한 책>이, 소위 책을 소유했다거나 만들었다거나 읽는다는 사람 주체의 관점에서가 아닌, 책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서관에서는 따스한 파스텔톤 표지에 어울리게 <행복한 책>이라 번역출간하였지만 원제가 임도 의미심장하다. 초록색 책은 독자들이 찾아줄 때는 행복했다가도 잊혀지면 이내 외로워졌기 때문이다. 신간 진열대에서 위풍당당 초록 광채를 뿜어내며 줄기차게 대출되던 신간 시절에는 모르던 외로움이, 낡고 허름해져서 더 이상 아이들이 찾지 않게 자주 찾아든다.
책은 외로웠다. The book was loney. 작은 여자애가 흔들의자 밑에서 찾아내기 전까지는 더욱. 작은 여자아이에게 더할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을 받자 초록색 책은 다시 초록 광채를 방사한다. 그러나 여차여차하여 도서관 지하실에 잘못 틀어 박히게 된 책. 소녀를 기다리던 책 속 마법의 버섯 아래 서 있던 소녀마저 외롭고 그리워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흘리던 초록 책은, 비에 흠뻑 젖은 소녀의 따스한 품에 안긴다. 너무나 반갑고 좋은 나머지 살포시 눈마저 감고 있는 소녀의 미소..... 크리스 쉬밴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캐이트 베른하이머가 전하고 싶어한 소녀의 감성, 그리고 책과 소녀간의 강렬한 연결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 그림이기도 한 소녀의 미소가, 자꾸 자꾸 생각난다.
좋아하는 책들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나의 꼬마처럼, 소녀도 책을 꿈꾸며 잔다. 마지막 장이 뜯겨져 나갔지만 소녀에게는 영원을 믿는 순수가 있기에 개의치 않는다. 소녀의 책은 종결이 아닌, 진행형의 마법을 부려주기에. 소녀가 책을 기억하고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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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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