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가을 날 오후, 야외에서 꼬마들에게 <시튼 동물기>를 읽어주었습니다. "얘들아, 여기 동물 이야기 책이야."라고 관심을 환기시켜 읽어주기 시작했지만, <시튼 동물기>는 죽음, 아니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어떻게 죽을지', 즉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에 대한 동화책이더군요. 아직 생과 사, 순환하는 우주의 이치를 이해하기에는 까마득하게 어린 나이의 아이들인지라, 우선은 로보와 와프 그림에 눈길을 먼저 줍니다. 그림 속에서 통나무도 찾아내고, 거북이와 부엉이를 숨은 그림 찾듯 찾아내며 신나라 하네요. 엄마는 <시튼 동물기>를 덮고 제일 먼저 작가 고은 시인의 생년을 확인합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고은 선생님은 1933년에 태어나셨습니다. 팔순 연세......'아 그렇구나.....' 왜 <시튼 동물기>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대비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고도로 압축된 동화로 읽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시인은 늑대왕 로보처럼 위엄있고 당당하게, 회색곰 와프처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부드럽게 생의 끝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것 또 읽냐고 물으면

엄마 나는 여기가 참 좋아요

이리 왕 로보의 당당한 죽음

회색 곰 와프의 죽음이 좋아요

(시튼 동물기의 본문 중에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차령이는 <시튼 동물기>를 읽고 또 읽습니다. 로보의 당당한 죽음 회색 곰 와프의 새록새록 죽어감이 좋답니다. 엄마가 차령이에게 한마디 말해 줍니다. "차령아, 이 세상 생명은 다 죽는 거란다 (All lives in this world are destined to death.). 그러자 차령이도 눈을 빛내며 '나도 알아, 나도 알아.'합니다. 엄마와 차령이의 대화에게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공포, 혐오, 혹은 죽음의 언급을 금기시하는 은밀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신 모녀는 죽음을 자연스런운 생의 일부이자 우주의 원리를 따르는 경건한 노정으로, 즉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몇 달전 '어린이를 위한 철학동화'라며 '서울대 논술문제 연계주제'임을 강조하며 억지스럽게 죽음의 문제를 다룬 유치찬란하다 못해 폭력적인 책을 읽고 화가 났던 마음이 이제서야 달래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서정적이고도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전할 수 있구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유해볼 수 있구나. 대가 고은 선생님의 오랜 인생의 연륜, 작가로서의 천재적 역량이 아니고서야 해내기 어려운 미션이었을 듯 합니다.

 

영국 태생이나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 많은 한국 문학을 영역해온 공로로 옥관 문화 훈장(2008)까지 받은 안선재 교수가 시튼 동물기(Seton's Animal Stories)를 번역하였습니다. 석판화 기법의 추상적이면서도 깊이가 물씬 풍기는 한병호 작가의 그림을 입은 <시튼 동물기>가 영어권 많은 나라에서도 읽혔서 한국 문학의 우수성, 독특한 철학과 여백의 미학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