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치곤 한 번씩은 경험하고 머쓱해지는 착각이겠지만, 나 역시 "우리 아이 혹시 natural born story-teller?" "우리 아이 상상력, 혹시 천재?" 내가 그렇게 반응할 정도로 아이가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마구 지어낼 줄 알았다. 어찌나 기대가 컸는지 아이가 유치원에서 오자마자 손씻은 후 간식이라는 평소의례를 무시하고 대뜸, "이 책 펴봐. 삐에로가 뭐라고 왕에게 이야기 하는 거 같니?"라고 물어보는 횡포를 저질렀다. "우리 아이 혹시 천재적 이야기꾼?"하는 허망된 욕심에 사로잡혀 아이의 상상력을 쥐어짜려는, 아이의 반응을 판단하려는 횡포를 저질렀으니 아이는 움찔 하는 수밖에.

"에이,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

정말 충격적인 반응이 나왔다. 충격이었다. 아이가 시공간에 묶인 어른들의 제한된 상상의 세계를 넘어서, 나를 개안시켜줄 나를 감복시킬 멋진 이야기를 술술 쏟아낼 줄 알았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소위 아이의 창의력을 재단해보려는 욕심이 기저에 있었음을 아이인들 몰랐으랴? 곧 나의 무지와 횡포가 부끄러워졌다. 글자를 지움으로써 가장 열려진 이야기 구조의 책을 되려, '빨리 이야기 만들어봐. 뭔데 뭐야?"하는 몰아세움으로 아이에게는 거부의 닫힌 책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놀랄만한 생동감이 그득한 표정의 인물 illustration이 매 페이지 한 명씩 차지 하고 있는 이 책의 인물 배치방식은 무작위로 보일지언정,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왕궁의 광대에서 시작하여 왕, 다시 왕의 기사knight, 기사와 마찬가지로 철갑 헬멧을 쓴 잠수부 (betterbooks출판사에서는 외계인이라고 소해했지만, 어김없는 잠수부의 복장이다), 다시 표지에 나온 해적아저씨, 아저씨의 말벗일 듯 한 앵무새, 다시 앵무새는 소위 '원주민 aboriginal people', 그는 다시 사진기를 목에 걸고 있는 관광객, 다시, 관광객은 콧대높아보이는 소위 '서구의 부유층'으로 원주민과 대비를 이루어 보이는 중년의 여인, 다시 그녀는 투실한 체격의 할머니, red hood를 쓴 늑대가 할머니의 귓속말을 받고, 다시 늑대는 red hood소녀에게 소곤소곤. 소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사냥꾼. 사냥꾼은 다시 hunting dog에게, 다시 이야기는 크게 한 바퀴 돌아 개는 맨 첫장에 나왔던 왕궁의 광대에게.

아이는 아무래도 자신이 익숙한 그림에 편안해 한다. 원주민 그림을 보고는 내 눈에는 중년 남자이건말, 기어이 '입이 나온 아줌마'란다. 임금님은 기사에게 '계속 싸워서 다 이기라'고 했다고, 잠수부는 해적에서 '바다에서 신기한 상자를 발견했다'고 툭툭 한 마디씩 자신의 해석을 내 뱉는다. 아이의 마음은 빨간 모자 소녀에게 머무른다. "엄마, 이거봐. 할머니 옷을 늑대가 입었어. 잡아 먹은 거야. 그리고 늑대가 입은 빨간 옷이랑 여자애 옷이랑은 다르게 생겼어. 이건 얘가 처음부터 입고 온거야. 아직 잡아 먹힌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