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책은 마치 드라마를 글로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평처럼, 이 소설의 캐릭터와 구성은 매우 전형적이다. 하지만 재미있다. 그래서,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애매한 마무리까지, 영상화를 고려하고 썼다면 이해가 간다.

3. 그래서 일주일에 적어도 드라마를 한편정도는 보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마,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래 붙잡고 있기 힘들 수 있다. 대사와 캐릭터, 그리고 구성이 너무나 익숙하다. 단지, '근대'라는 배경과 이에 따르는 시대적 장치들을 사용했을 뿐 기본 골격은 유행하는 드라마와 크게 다를게 없다. 즉, 심심할 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읽는 킬링타임 소설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드라마도 원래 킬링타임용 아니던가?

이와 관련하여 최근 읽은 '사우스포 킬러'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감정들은 참 이해하게 쉽게 제시된다. 그래서, 읽기 편하다.

4. '근대'라는 배경설정은 인상적이다. 그것도, 해방 직전의 준식민지화 단계에 있던 시대. 역사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당시의 삶은 매우 퍽퍽하고 잔혹하다. 무리하게 시작된 태평양전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국방선과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 등으로 당시 일본제국은 미쳐가고 있었다. 그들은 수탈할 수 있는 곳에서라면 무엇이든 동원했다. 조선과 만주, 그리고 새로이 점령한 중국 내륙과 동남아 일대가 모두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절박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한 절박함이, 너무 진부하고 신파적이어서 사람들이 꺼릴 것이라는 염려에서 였을까? 차라리, 192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친일파 귀족의 진면목을 효과적인 반전으로 스피디하게 그려내기 어려웠겠지.

5. 그 외에 캐릭터들의 행동과 설정 등에서 종종 눈에 걸리는 점이 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미유키의 유창한 조선어 히어링 실력이 있다. 미유키는 거리를 다니면서 들리는 민중들의 거칠은 조선어까지 이해할 정도로 조선어에 능한 일본인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미유키는 본래, 천황에게 바쳐지기 위한 목적으로 교육받던 여성이다. 따라서, 본래 조선어를 배울 이유가 없다. 민석과 사이에서 낳은 슈헤이의 나이를 고려할 때, 조선에 체류한 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더욱이 그녀는 화족이다. 조선어가 다시 금지되고, 일본 중심적으로 조여가던 당시 조선분위기를 고려할 때, 굳이 조선어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아마, 민석도 그녀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을테고. 차라리, 미유키의 시녀가 조선어를 잘했더라면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6. 어쩐지, 비평이 주가 된 글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좋은 점도 최소한 2가지는 꼽을 수 있다.

6-1. 철도를 따라 건설된 지하도의 존재. 인상 깊은 설정이다. 동시에 비현실적인 설정이기도 하고(...일본군인들이 호구냐?) 어쨋든,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수고에 비해 특별히 제대로 굴려먹지 못한 맥거핀 같은 설정) 예전에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지하에 건설했다는 카파도피아같은 걸 상상했는데 그건 좀 무리였나 보다.

6-2. 작가의 필력.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가 비교적 매끄럽게 잘 풀려간다. 독자를 홀리는 끈끈함도 있다. 다음 장을 궁금하게 만드는 묘한 맛이 있는 작가다. 다만, 전형적인 글전개가 좀 아쉬울 뿐. 하지만, 드라마가 다 그렇지 않던가. 이 소설은 드라마로 찍는다면 차라리 나을 것 같은 책이다.

7. 정리하자. 할리퀸 로맨스를 좋아한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즐겨본다면 역시 재미있을 것이다. 근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순식간에 다 읽을지도 모른다. 골치아프고, 피곤한 일상속에서 쉬고 싶다면 역시 추천한다.

8. 이 글을 쓴 작가와 출판사에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900p에 달하는 글은 쉽게 쓰고 출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도 참신한 설정과 이렇게 끈끈한 필력을 가진 글은. 앞으로 어떤 글을 낼 지 기대된다. (다음에는, 한반도와 일본 본토를 잇는 해저터널이라도 뚫어보는건 어떨까요? 어? 이건 쥘 베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