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교』는, 유서로 남겨진 이적요 시인의 노트와, 이적요 시인의 분신처럼 살아온 그의 애제자 서지우의 일기가 교차되면서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 그들 사이에 끼어든 절대적인 존재 은교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내밀한 욕망과 근원을, 그리고 일상의 낮과 밤을, 시간의 흐름대로 때로는 감정의 굴곡을 따라, 스토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존경받는 시인 이적요의 사망 일주기를 맞이하여, Q변호사는 시인의 유언대로 그의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신비주의를 비겁한 것이라 말했던 시인은,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를 원했다. 이적요 시인은, 살아생전에 열두 권의 시집으로 대중들과 전문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시대를 앞질러 견인하는 경이로운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그의 노트에 기록된 것은 분별을 잃은 사랑과 살인에 대한 고백으로 점철되어 있다. 열일곱 소녀인 은교를 향한 사랑 고백과, 애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작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살인 고백, 그리고 서지우의 작품이라 믿어왔던 모든 것이 실상은 이적요가 써준 작품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적요 기념관 설립으로 분주할 때,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고, 서지우 역시 은교에게 일기를 남긴 것을 확인한다. Q변호사가 바라본 은교는 이적요 시인이 보았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서 오는 특별한 것이 아닌,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로 인식했다. 하지만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눈빛, 세상을 보는 것처럼 아득한 반짝임을 본다. 

 

 시인 이적요는 첫눈에 은교를 사랑했다. 일찍이 시인에게 이런 낯선 경험은 없었다. 쇠별꽃처럼, 정교한 세필로 그려진 창처럼, 우주의 비밀처럼.. 끔찍한 발화처럼 맹렬히 세워진 육체의 그것은 은교에 대한 시인의 욕망이 꽤나 사실적이었음을 드러낸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입곱 살 어린 처녀이고 이적요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이들 사이엔 오십 년이 넘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이런 이유로 시인의 사랑을 변태적인 애욕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애당초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으며 사랑 그 자체는 분별력 없는 광기, 미친 감정이 아닌가! 은교는 시인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을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함께 하는 동안은 생애 전체와 맞바꿔도 좋을만큼 아름다운 경지였으며, 죽음을 향하는 자신의 몸에서 죽음이 떠나기도 했다.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던, 평생 동안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과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가는 낙타 같은 존재였던 서지우는, 시인에게 모든 것을 바쳐도 좋았다. 그러나 스승이 써준 <심장>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부터 모든 것에서 불온하고도 미묘한 움직임은 시작된다. 그것은 은교의 등장 이후 급격한 확장을 거듭했고, 그들 모두를 지옥불에 뛰어들게 했다. 유명 작가가 되었어도 명성만으로 행복할 수 없었다. 결국은 허울에 불과한 껍데기가 않은가? 노랑머리가 가르쳐 준 '눈 감으면 송장', '썩어가는 관 같은' 시인은, 은교를 사랑한다는 것에,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죽지 못하는 현실이 제일 슬펐다. 그러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살붙이 같은 정을 느꼈던 서지우에게 배신당한 고통은, 사랑의 고통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시인에게 서지우는, 단 하나의 가족이었고 모든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을 내보여도 되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늙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와 기형으로 취급하고 스승을 배반한 모욕에 시인은 피를 흘리는 기분이 된다. 비정상적인 욕망과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으로, 맹목적 잔인성을 갖게 했다. 서지우는 시인과 달리 현실의 은교를 알고 있었다. 연민으로 시작된 원조교제.. 하지만 은교를 바라보는 스승의 타오르는 시선을 한눈에 알아보고, 서지우의 눈빛 또한 스승의 욕망과 비례하여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그의 명성이 가면이듯, 그의 사랑 또한 가짜에 진배없던 것이다.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 내가 은교의 손을 처음으로 쥐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이다. -P200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P203

 

이적요와 서지우 그리고 은교, 세 사람 모두가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교는 은교대로 '할아부지와 선생님'이 서로가 너무 깊이 사랑해서 자신이 버림받은 기분을 가졌고, 시인은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여 젊음을 욕망했으며, 서지우는 스승의 마모되지 않는 도저한 욕망을 부러워했다. 서로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은 탐욕을 불러왔으며 그들의 삶을 통째로 갉아 먹었으며 종국엔 파멸로 치달았다. 소설 『은교』는, 늙은 시인의 노트를 통해 늙어가는 것에 대한 남루한 절망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싱싱한 젊음 앞에 암묵적으로 흐르는 강력한 배타성과, 세대 간의 단층을 무참하게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한 소녀를 향한 두 남자의 사랑이 지배적이나,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론적 질문을 툭 던진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눈물겹고 뜨겁고 푸른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이 놀랍고 기민한 소설이 한 달 반 만에 완성됐다니 '이적요 시인처럼 미친 질주'에 동화되어 치열한 정신과 혼을 쏟아부은 박범신 작가의 열정에 절로 충만해진다.

『은교』, 박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