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우리를 떠났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에게 우리나라의 과거 시대를 반영하는 모습을 그려줄 큰 별이 진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했고, 나는 그 분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던것에 대해 부끄러웠다.

'토지'는 나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통으로 바치며 읽은 책이다. 긴 장편소설을 읽다보니 인물들에 몰입되어 마치 내가 그 당시에 살은것마냥 한때 푹 빠져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박경리 선샌님의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9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하여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노을진 들녁'은 1961년에 발표되었으니 토지가 시작하기전에 그려진 밑그림 정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반대로 토지를 먼저 읽고 노을진 들녁을 읽은 이들은 다소 이야기의 구성에 실망을 느꼈단 부분이 작품해설부분에 포함되어있었다.

허나, 토지와 노을진 들녁을 조금 거리를 놓고 나는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

 

송화리에서 큰 과수원을 가지고있는 송 노인은 큰 아들은 행방불명이 되고 딸과 며느리는 열차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려 손녀 주실과 외손주 영재만이 자신의 곁에 남아있다. 하지만 영재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살고있어, 손녀 주실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까 두려운것인지, 그녀를 보호하려는 의무감때문인지, 주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산속에서 자유롭게 방목(?)하며 키운다.

송 노인의 표현에 따르면 주실이 '우리집 원숭이 새끼'라고 한다. ^^ ;; 그만큼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라던 주실이 어느 날,  애를 가지는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송 노인과 성삼이 사이에는 짙은 어둠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따금 언덕배기에서 꾸부러진 수목의 마른 가지가 바람에 울었다. 칼날을 품은 듯 날카로운 송 노인의 압력은 조용한 속에, 어둠과 바람을 타고 성삼의 가슴에 와 부딪쳤다.

송 노인은 성삼이라는 젊은이를 불러 이 일을 추궁하기 시작하는데, 알고보니 성삼이는 주실을 건들인적이 있긴하나, 애 아버지는 따로 있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바로 송 노인의 외손주 영재가 범인이라는 것.

이런 청천벽력같은 일이 있나!

송노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것이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그렇게 곱게 그렇게 아끼며 키웠던 주실을 이렇게 억울하게 잃다니!

아마 손녀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것에 대한 분노도 있었을것이다. 자식딸며느리 그렇게 잃고 손녀마자 잃었다 생각했을것이다.

그렇게 송노인이 정신을 놓고있는 사이 송 노인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또 주실에 대한 동물적인 애욕, 게다가 영재에 대한 질투심이 뒤섞인 마음으로 성삼이는 또 한번 주실에게 몹쓸짓을하고, 주실과 결혼을 요구하게 된다.

성삼은 송 노인이 그런 수모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확신하였다. 소모를 당하지 않는 길은 자기에게 주실을 주는 도리밖에 없었다.

주실을 온실속 화초처럼 곱게 키우려했던 송 노인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돌아보지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온갖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주실을 보는것이란 쉽지 않았을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마구간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하고 만다.  

하지만 끝없이 파고드는 성삼의 욕망과 주실을 그에게서 벗어나게 해야 자신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을 영재가 드디어 붙고만다. 그리고 .. 생각치도 못한 결과가...

이렇게 불행한 운명을 살게된 사람들은 그 자신의 욕심때문 아닐까.

언젠가 '내게 지금 닥쳐온 일은 과거의 일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다'라는 문구를 읽은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여기에 딱 맞는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의 인생은 아무리 기를쓰고 애써도 정하는 방향으로 흐를수 없다는 것도.

노을진 들녁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는 주실이 이제는 행복의 길로 들어섰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