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빠르게 읽을 수가 없었어요. 요즘에 저는 책으로 동굴을 만들어두고 그 안에서 읽는 것밖에는 하지 않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는데 보르헤스의 책을 손에 들고 있을 때면, 시간은 날 데려가지 않았어요.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에 담긴 열일곱 편의 단편들이 내 눈은 물론이고 모든 감각들과 뇌의 모든 부분을 송두리째 잠식하고 있었어요. 한 편을 읽어 가면서, 때때로 제논의 역설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하고 착각에 빠질 때가 많았어요. 그러면 당장에 겁이 나서 읽고 있는 단편의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하려 갈피를 뒤적였고, 이야기가 맺어진다는 확인을 하고 나서야 진정하고 다시, 활자를 더듬어 나갔고요.

보르헤스, 이 영감쟁이 전집의 세 번째는 <알렙>이었습니다. 알렙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고요? 물론 그럴 거예요. 저도 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이거 뭐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주석을 멀미가 나도록 많이 달아 둔 번역자의 각주를 그대로 옮겨 놓는 게 확실한 설명이 될 것 같아요.

“Aleph : 히브리어의 첫 번째 알파벳. 동시에 숫자 <1>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세계의 모든 것이 그것에 수렴된다고 본다. 또한 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p.207 <알렙> 각주 1.

어떠세요, 대충 감이 오는 것 같나요?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들은 후기와 해설까지 포함해서 260쪽에도 미치지 못해요. 어떤 소설―<두 왕과 두 개의 미로>―은 단 한 장에 담겨 있기도 하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이 소설들을 읽어 가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하는 물음이 한없이 맴돌았어요. <죽지 않는 사람들>을 마치고, <죽어 있는 사람>을 넘기고서 차근차근 열일곱 가지의 축약된 <천일야화>를 모두 읽고 나서야 보르헤스 영감쟁이가 하고 싶었던 얘기의 흐름을 잡을 수 있었어요.

언어, 주석, 미로, 영겁의 환생. 시작과 끝도 없는 무한궤도의 원과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의 점으로 수렴할 수 있는 무엇―신(神, ?)―에 환장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 작품집의 마지막 작품은 <알렙>이었어요. ‘차례’에 나열되어 있던 열여섯 가지 이야기들은 모두 <알렙>으로 수렴되기 위한 세상의 이야기였어요. 수렴으로 끝이 나냐고요? 아니요, 그 안에서 다시 <알렙>과 세상은 무한하게 발산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읽었던 영감쟁이의 전집 중에서 그래도 가장 수월하게 읽은 느낌이에요. 비비 꼬아 놓은 듯한 상징들은 별로 없었거든요. 오히려 굳이 알지 않아도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부분에 달아 두었던 그, 멀미나는 각주들이 신경을 건드렸지요.

즐거운 이야기들입니다. <엠마 순스>라는 단편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탄탄한 구성으로 짤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지 여러 번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보여주는 반전에 기가 막힐 뻔 했고요. 그런데 아직 보르헤스 영감쟁이는 하고 싶은 얘기가 덜 끝났나 봐요. 아직도 그의 네 번째, 다섯 번째―마지막의―작품집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엄청난 뻥들의 향연이지만, 그 뻥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얼핏 보고 말았어요.

<책에서>

아무도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단 한 사람의 죽지 않는 인간은 모든 죽지 않는 인간들이다. 마치 꼬르넬리우스 아그리빠처럼, 나는 신이고, 나는 영웅이고, 나는 철학자고, 나는 마귀이고, 나는 세계이다. 이것은 바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분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p.28 <죽지 않는 사람들>, 또 “~에 다름 아니다”를 남발한다. 개정판에서는 고쳐줄까.

죽음(또는 그것에 대한 유혹)은 인간을 소중하고 애상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인간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환영적인 존재 조건 때문에 가슴 뭉클해한다. 인간이 행하는 각 행동은 그들의 마지막 행동이 될 수도 있다.

-p.29 <죽지 않는 사람들>

……역사는 순환적이고, 과거에 없었거나 미래에 없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교리를 가르쳤다. 산악 지대에서는 <수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