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에세이에서 소개된 책이었는데,

짧은 줄거리만 읽고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언젠가 꼭 전편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다.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떠났다가 또 다른 일상의 반복에 갇힌 남자.

 

선생님으로 일하던 한 남자가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가를 이용해 모래땅으로 곤충 채집을 나선다.

해안가 모래 언덕에는

지하로 20미터 가까이 패인 모래 구덩이마다 집을 지어놓고 사는데,

남자는 마을 사람들의 계략으로 여자 혼자 사는 구덩이에 갇히고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히지 않도록 매일 삽질을 해야한다.

마을에서는 이 모래를 팔아 마을을 유지한다.

남자는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다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만,

마을 밖으로 나가는 방향을 몰라 소금밭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결국 마을 사람들에 의해 다시 모래 구멍속으로 돌려보내진다.

그러던 중 남자는 우연히 모래 속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유수 장치를 발명하게 되고

여자는 임신을 하였으나 자궁 외 임신으로 진단되어 병원으로 가게 된다.

"희망"이라고 이름 붙인 까마귀 덫에 모래의 모관 현상으로

표면의 증발이 지하의 수분을 빨아올리는 펌프 작용을 하여 물이 고이게 된 것이다.

여자를 올려보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쓰고 놓고 간 새끼줄 사다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신이 발명한 유수 장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탈출을 뒤로 미룬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모래 구덩이 속에 사람을 가둬놓고 비합리적인 노동을 시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며 탈출할 방법만 모색하던 남자가

서서히 그 속에서의 삶에 적응해가며,

심지어 탈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결말이란 충격 그 자체였다.

 

남자의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 모래 구덩이 속에서의 생활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작가가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해 본 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불러일으켰다.

그정도로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소설이었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정말 생각해 보니,

언제 어떤 식으로 탈출의 기회가 찾아올지 전혀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기약 없이 그저 기다림에 길들어,

드디어 겨울잠의 계절이 끝났는데도

눈이 부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구걸도 사흘을 계속하면 그만두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 내부로부터의 부식은 의외로 빨리 진행되는 것인 모양이다.

 

끊임없는 흐름을 가진 모래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찾아온 곳에서

뜻하지 않게 바로 그 모래 때문에 붙잡혀 떠나지 못하고 정착해버린 남자.

모래를 퍼내는 노동을 통해 시간을 견뎌내고, 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고,

어느덧 그 노동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는 일련의 과정들.

 

우리도 어쩌면 스스로가 만든 모래 구덩이 속에서

모래를 퍼내며 적응해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평 불만을 하면서도 몸에 익은 일이기에 쉽게 놓고 나오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별다른 생각없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