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도 인연이 있다

크리스마스, 신촌의 밤거리에 두 사람이 서있다. 지나가는 누가 봐도 ‘어머 저이들 소개팅 하나봐 호호’  알아챌 수 있는 뻘쭘한 기운을 내뿜으며 풍경의 한 조각을 차지하고 있다. 저기 근데 혹시 롹,,하세요? 정적을 깨는 남자의 목소리.

몇 일전 찾았던 미용실의 주인이 일본인이었을 뿐, ‘롹’과는 전혀 무관했던 그녀이지만. 편의상 록커양이라 부르면, 록커양에게는 20살의 첫 소개팅이었다. 남자는 ’록 하는 여자 + 만 19살 미성년자’ 라는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어찌할 바 모르다가 독백한다. 사실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좋아 할지 모르겠네..

한 손에 군고구마를 싸들고 골목을 헤치며 도착한 그곳은 근방의 헌책방이었다. 젊은 주인과 환담을 나누던 그, 편의상 고구마군이라 하면 그는 이제 막 시공간을 잡아먹은 종이들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문득 주인이 그녀에게 묻는다. 아! 그런데 저분은 누구야? 혹시 록.. 하세요? 그 순간 내일 당장 머리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록커양. 그래도 동참하여 책 거죽들의 온기에 손을 녹였고, 왠지 계속 미안해하는 고구마군은 록커양에게 기념으로 책 한 권 선물해주겠노라 골라보라고 한다. 마침 눈에 띄던 한 책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고구마군의 표정은 점점 기괴해진다. 록 하는 미성년자가 집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 나야 말로 지금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딱 이런 얼굴이다.

사실 그 책은 록커양에게 섬광과도 같았다. 만약 그 때 짜라투스트라가 아니라 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같은 시집을 골랐다면 분위기는 좀 더 나아졌을거라 아직도 생각하는 그녀이지만. 특별히 고전에 심취하지 않았는데도 그 책을 집어야 했던 이유는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책방에서 발견한 그 책의 작가가 ‘니체’가 아닌 ‘니이쩨’라는 것이 대기와 너무 어울려 록커양을 끌어당겼던 것이었다. 사실 록커양은 고구마군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분명 더 책향기를 좋아했는데 설명할 길도 막막했다.

그래,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 보다는 한 책과의 만남 이야기. 나는 아직도 내 책장에 있는 니이쩨를 보면 풋풋했던 고구마군과 록커양이 만났던 신촌역, 거리를 장식하던 징글벨과 저기 록..하세요? 하는 소리를 듣는다. 구식 난로 옆에 서서 눈 내리던 바깥을 보던 그날이 생각난다.  찾아오는 객도 없는데 연신 열없이 웃던 안경잡이 책방 주인의 피부는 눈보다 창백했다. 고구마군은 말없이 고구마만  한겹씩 벗겨 주었고, 오물오물 입에서 퍼지던 고구마의 달콤한 맛이 돌기를 스친다. 그 모든 것들이 헌책방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차라투스트라와의 로맨스다.

보는 재미, 읽는 재미, 만지는 재미

 

여기에는 이웃 사람들의 28개 로맨스가 있다. 단지 이웃집과 조금 다른 이유를 꼽자면 그들은 로맨스를 그들의 삶 자체로 승화시키며 책을 오감으로 읽는다는 것. 책을 버리면 곧 삶을 부정하는 기분이라고 말하는 그들이다. 그들은 책 무게에 방구들이 꺼져 고민한다. 아파트가 무너질까봐 고민한다. 한 권을 300그램으로 치니 책 무게만 3톤이다.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책들은 ‘거실 벽에 퇴적되고 가족들의 방까지 범람한다.’ 자신은 더워 쩌 죽는 한이 있어도 책의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준다. 이쯤이니 집주인이 사람에서 책으로 바뀐지 오래다.

분명 지구인들이다. 나도 반쯤 읽다가 호기심이 발동, 책장을 헤아려봤는데 어린 시절 도서들과 전공서적을 제외하면 400여 권의 알맹이가 남는다. 책쟁이들이 힐긋 보더니 심드렁하니 던진다. 아직 멀었어. 뭐 적어도 4000권 이상은 되어야 우리랑 대화할 수 있다고. 그게 또한 신사숙녀의 서재라 할 수 있지! 그러니 서점에서 오랜만에 빈손으로 나오는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명언이다.

책 사기를 절제 한다기 보다는. 책 둘 공간을 아끼는 거죠.

어휴, 그래도 한숨이 푹푹 나오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좋아서 하는 일에 이유를 묻기는 어리석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한다 싶은 것이다. 아버지 돈 빌려, 알바비 모아, 모니터 기자 고료들까지 푼돈 모으는 족족이 나무토막들에 쓸어 부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등의 타박. 남 이야기니까 이렇게 막말 하는 것 분명하다. 이런 나도 몰래 엄마아빠 카드를 긁고 영수증을 배게 밑에 묻거나 땅 속에 묻고 있는데 모아보니 무서워져 태울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연말 결산이 다가온다. 이들과 약간의 비슷한 기질을 포착한 나는 실지로 벌벌벌 떨었고 책물에 밀려 집 밖으로 내가 떠내려가는 일은 벌이고 싶지 않아졌다! 
 
끝까지 책 박물관이 세워지지 않는다면..폐지로 전락할 그 자산들은 도대체 누가 지켜야 하는거지? 화봉 박물관 여승구 관장님 이야기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묻었고, 토라 연구가 이기대님의 이야기 중 ‘그에게 ’책을 왜 읽나‘와 ’왜 사는가‘는 동어반복이다’ 구절 페이지에서는 거의 페이지 속으로 발 집어넣을 만큼 공감했다. 젊은 논술강사의 ‘소통’ 에 대한 담론에 너울너울 혼이 뺏겼다가 노교수님들의 지론에는 숙연해졌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책과 저자 한의사님의 논리에 으허허 웃다가도 깊숙히 새겨두었다. 

이상에 대한 열정에 현실감각의 냉정함을 레몬즙처럼 뿌리며 균형을 맞춰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이는 어쩌면 희망사항이다. 여행을 하며 녹차를 마셔야 하는 이유..춘천 북까페의 김종헌 책쟁이 이야기에는 마음이 편해졌지만 동두천 시인 김경식 이주원 책쟁이 부부 이야기에는 그 겹겹이 더케처럼 묻어나오는 고독에 도리질이 쳐졌다. 기분이 질겅질겅해진다. ‘겨우 존재하는 연습’ 이라..또 한숨이 나온다. 시인은 정말 하늘이 부여한 존재 같다. 

빌린 책은 갚는 것이 인지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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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의 헌책방 뿌리서점 주인은 말한다. 돈에 욕심을 냈더라면 빌딩을 여러 채 샀을 거라고. 그는 “국민의 이에 얼마만큼의 보시를 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책쟁이는 그동안 책 산 돈을 땅에 투자했으면 부자가 됐을 거라고 말한다. 말인 즉 옳다. 현대 금융사회에서 돈은 곧 흐름이거니 부라는 것은 좋은 길목에서 흐름을 낚아채는 것 아닌가. 책쟁이들까지 모두 들고 일어나 돈낚시에 나선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돈과 이름값에 오로지 미친 세상에서 책에 미친 미련퉁이들이 있어 더불어 살만하다.

 

지은이, 임종업님의 말이다. 그래서 일거다. 책쟁이 이야기를 쓰는 서평단에 뽑히게 해 준 책쟁이 친구의 10년 지론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빌린 돈은 못 갚을지언정 빌린 책은 가져와라" 

학창시절 그 친구 책 한 번 잃어버리고 대역 죄인이 되었기에 책 주시면 그 책쟁이 한테 빚 갚겠다 장난 반 진담 반 적어놓던 시각은 새벽 6시. 뜨끈한 카페인을 들이붓고 서점가서 사서 봤다.

책은 차곡차곡 쟁여두다 보면 쉽게 남에게 보이기 어려워진다. 은밀한 내면, 간직하고픈 소소한 것들이 공개 순간에 옅어지는 기분. 특히 밑줄이나 메모가 있는 책들은 하나하나가 내 일부가 되어버리는데 빌려주는 것에 있어서는 그 생각을 들키는 것 같아 정말 용기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기분을 지은이는 이렇게 멋나게 표현한다. ‘주인 외의 수선한 눈길이 머물면 그 사연들은 가뭇없이 사라져 부끄러움은 초라하게 내면화한다.’ 그런데도 쉽게 빌려가고 잊어버리는 친구들을 보면 난 정말 믿을 수가 없다. 에이 이 나쁜 놈들 너희들은 다음 생에 나무로 태어나 책이 되거라! 악담 아닌 악담을 하며 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우하하하 이 소인배 근성.

그래서 더더욱 이 책에 나온 분들의 책 기증, 책 나눔 행보가 존경스럽다. 처음에 나는 책을 모으는 족족 도토리마냥 숨겨두고 여느 책에 나온 것처럼 3대를 물려 가보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얼핏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2000권 안팎이라는 권수를 정해두고 넘치면 흐르게 하고 모자르면 채워 넣으며 자유롭게 흐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의 마지막에는 홀랑 어린이들에게 기증할 생각이다. (참 꿈이 크군. 하하)   아직껏 책 빌려가고 연락 끊긴 녀석들을 줄줄이 기억하기에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시원하게 외치고 2009년 나의 키워드, 대인배가 되기 위해 남은 두 달을 보내겠다.  

 

이것들아. 빌려간 차비와 장신구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내 로맨스들은 돌려주시게 -_-

 

한국의책쟁이들, 임종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