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의 힘 

사회와 분단에 대한 고민.

퀘퀘묵다 못해 숙성되버린 다락방 먼지떼기처럼 여겨졌던 그 화두가 
어느 순간 머리를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던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읽은 태백산맥에서였다. 
단절되어 느껴지던 막막한 과거가 
실제로는 내 사정거리에도 뿌리박혀 지독하게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사람들을 비웃으며 활기치는 꼴은 
구역질을 나게 한다.

혈기는 가라앉고 생각이 고이는 시기.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내 모습이 
허영과 사치. 보여지는 것을 좇아갔기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가치있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었으면. 
그런데 난 아직 ’아리랑’의 슬픈 곡조도 낼 줄 모르고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2003년의 이 메모를 보다가 나는 조금 감격하고 말았다. 내 글이 좋아서 감격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내가 가장 피하는 일 중 하나가 예전에 지분거려둔 글을 보는 것인데, 더구나 당시 순간과 지금의 순간을 꽤 넓은 시간의 덩어리가 채우고 있다면 오글거리는 손발을 주체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는 생각 없이 남겨둔 짧은 메모가 지금처럼 스치는 흥분을 줄 때가 있다. 단절된 시간이 줌 인 되는 카메라처럼 빠르게 이어지는 기분.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다. 오늘도 잠시 그 넓은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볼 수 있었다. 미열에 가득 찬 채 그 끝 장을 덮었던 순간으로.

이 메모가 없었다면, 나의 20살은 뭉뚱그려져 서서히 희미해져갔을 것이다. 
이 메모 하나로 난 평생 20살의 느낌을 오감으로 기억할 것 같다. 

혈기와 치기

그 때 지적했던 말 그대로. 조금씩 활기는 가라앉고 생각이 고이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예감이 마구 드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가. 난..청춘이 끝난 것인가.

다른 책 군단을 위해 이 책들과 다른 책들을 내방에서 옆방 서재로, 좀 더 편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주느라 들락날락하던 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난 그 때와 전혀 똑같지 않지만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든다.

혈기와 생각은 계단식으로 움직인다고. 고인만큼 높이 차오르고 차오른 곳에서 다시 고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뚜벅뚜벅 삶의 정점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 같다. 먼저 고이게 하지 않으면 젊은 혈기(血氣)는 치기(稚氣)에 불과한것 같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젊은이도 노년이나 다름없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인도 젊은이와 다름없다는 걸까.

생각을 더 쌓아서. 다시 계단을 오를 때는 좀 더 높이 날아 멀리 보고 싶다. 인내, 인내가 필요하다. 저 메모가 도망가려는 나를 암팡지게 붙잡고 있다. 메모라는 것, 이제 보니 원고지 10장의 글 보다 막강할 때가 있구나 싶다. 

내 뒤의 군단 

또 다른 책 군단이 든든하게 내 뒤를 봐주고 있다. 속된 말로 하면 세상의 어느 ‘빽’보다도 막강한 것이어라. 그 시간 밤을 새며 전집 군단을 이끌고 세상을 지휘하는 장군이었던 것처럼 실로 나와 함께 다시 전진해줄 군단을 재 모집 한 것이다. 이제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부터.

세계 전집과 고전들의 군단. 다시금 잡았던 10년의 시간을 가늠어보며 인내를 다짐해본다. 우리는 같이 우워어어 소리를 내며 발을 굴리는 심정으로, 랄랄라 손잡고 빙글빙글 춤추는 기분으로, 미간이 찡한 가을, 대면식을 올렸다.

10년 후, 그 때 발견할 지금의 메모는 또 어떤 메시지로 다가올까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한층 익어가는 느낌에 몸 둘 바를 모른 채. 다시금 미열에 들뜨곤 하는 것이다. 
혀를 대어본다면 풋사과의 맛.

새로운 자리에 터를 잡은 이 책들을 천천히 모두 펼쳐보다가 한 마디 안할 수가 없었다. 
같이 걸어주어 감사했습니다, 쉬시오 군단님들. 










 새것이었던 시절..눈부시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