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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쇼팬하우어가 우울한 염세주의자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정보가 없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아직 참가할지 여부가 확정되진 않았지만, 한 심리모임에서 이 책을 텍스트로 삼아 알아된 책이다. 읽기시작하면서 왜 진작 이런 책을 알지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느껴졌다.

정신과 의사이며 집단심리치료자이기도 한 저자는 쇼팬하우어라는 뛰어난 천재 철학자의 불행한 삶을 소설의 기법을 빌려와 재조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제불능이었던 성 중독을 그의 철학적 사상과 정신, 체험을 통해 치료받았다고 하는 ’필립’이란 빛나는 조연이 등장한다. 그는 쇼팬하우어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매력적인 남자지만 그에겐 뿌리깊은 인간혐오와 냉혈동물같은 차가움뿐, 어느 누구와도 상호작용이 안되는, 전혀 그런것에 관심조차 두지않는.. 뭐라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만큼 지독한 인간이다. 한때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성충동을 무작위의 여자들을 통해 해소하는 동물같은 섹스중독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그러한 자신의 내면을 분석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집단치료자인 줄리어스의 내담자가 된다.

하지만 3년여의 치료과정을 통해 그와 줄리어스는 지쳤고,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현실과 직면했다. 그렇게 결별.... 느닷없지만, 예정되어 있던 종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줄리어스는 성실하고 믿을만한 치료자다. 개인치료와 집단을 이끌면서 그는 몇십년의 삶을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모든 내담자에게 만족할만한 결과를 안겨줄 수 없다는 게 치료자들의 딜라마다. 그에게도 필립이란 실패한 상처가 가슴깊이 새겨져 있다.

어느날 연례적으로 받은 검진에서 자신의 몸에 피부암인 흑색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줄리어스는 충격에 휨싸인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크나 큰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고작 1년여...
혼란스러움과 공포속에서도 그에게 남겨진 일년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놓고 고민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 해밖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느라고 좋은 한 해의 시간을 나쁜 한 해의 시간으로 허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15페이지)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정리하며 치료자로서의 자신을 돌아본다. 늘 성공한 치료는 아니었다. 그는 의식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기억, 끝없이 좌절감과 우울함을 안겨줬던 특별했던 한 내담자를 건져올린다. 바로 주체할 수없는 성욕구를 어쩌지 못해 자신을 만나러 왔던 필립이라는 남자를.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치료에 실패한 내담자에 대한 양심이라해야할까. 그는 20년도 훨씬 전의 내담자의 전화번호를 추적하여 결국 대면하게 된다. 몇 년간 자신에게 섹스중독 치료를 받았던 내담자, 결국 치료에 실패했던 그가 철학상담자로 변해 있다. 인간에 대한 혐오와 냉혈한같은 모습은 여전하다. 아무와도 감정교류를 할 수 없는 그가 상담자가 되었다니!!

필립은 자신이 상담자가 되기위한 마지막 수업을 줄리어스에게 부탁한다. 철학을 전공해 교수가 된 필립은 마치 쇼팬하우어의 복제품같다. 그의 우울함, 그의 인간혐오, 그의 분노, 그의 대인관계 기피증 등등... 자신이 성중독을 쇼팬하우어를 만나면서 비로소 치유받게 되었다고 믿는 필립은 완전히 그의 그림자같은 모습이다. 자신에게 수퍼비전을 의뢰하는 필립에게 줄리어스는 6개월간의 집단치료에 참여할것을 요구하고, 조건을 충족시켜 치료자가 되어야하는 필립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집단치료 그룹의 참여자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다. 아름답고 총명한 영문학 교수 ’팸;, 미모의 변호사 ’레베카’, 성실하지만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보니’, 환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소아과의사 ’스튜어트’, 알콜중독자이며 아내와의 갈등을 호소하는 ’길벗’, 원시적인 인간에 가까운 ’토니’ 모두 나름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있는 그들은 집단에 참여하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직면하며 상처난 마음을 치유받고자 한다. 이미 진행되고 있던 이 집단에 이방인인 필립이 끼어든 것이다.

이야기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필립이 이 집단치료에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 팸은 자신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해보고자 인도로 명상수행을 떠난 상태였다. 첫 모임 후 커피타임을 가지면서 필립은 집단원들에게 줄리어스의 병에 대해 미리 떠벌림으로써 스스로 신뢰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후 인도에서 돌아온 팸이 집단에 동참했을 때, 그래서 그녀가 그곳에서 필립과 대면했을 때.... 이 소설의 극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세손가락 안에 들어갈 광경이다.

팸이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했을 때 필립은 그 학교의 조교로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성중독자였던 필립에게 순결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방적 통보로 관계를 정리한 필립은 이후 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유혹해 두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후 필립과의 집단치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그때의 성행동을 회상하면서 그리 고통스럽거나 더럽다거나... 하는걸로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커다란 상처였으며 고통으로 남아 있는 것같다.

회기가 거듭되면서 그들의 상호작용은 불꽃튀는 열정으로 타오르기도 하고, 냉정한 비판을 가하며 혐오를 드러내기도 하면서 무르익어 간다. 줄리어스는 토니를 자신의 사후 집단을 이끌 리더로 생각하며 긍정적 피드백을 줌으로써 강화를 돕는다. 팸은 여전히 독설로 필립을 공격하고... 숨막힐것같은 치료 세션이 눈앞에 그려지는듯 실감난다.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두말없이 이 부분을 꼽겠다. 내 무의식을 건드려 눈물흘리게 한 장면, 바로 필립이 자신의 내면고백을 하며 눈물흘리는 장면.... 곤충을 죽이는 화학약품을 연구하는 화학도였던 그는 심각하게 왜곡된 자아상을 갖고 있었고, 그로인해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었다. 그러한 모든 심리적 요인들이 아마도 그를 무작위의 여자들, 그러니까 감정적 교류가 전혀없는 섹스중독자로 만든것이리라.

그의 가족관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나 그가 쇼팬하우어처럼 매우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라는, 전혀 사랑을 받지못한 어린애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의미를 두었던 부분도 그것이다. 어린시절에 상처난 가슴과 영혼은 어른이 된 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아 어두운 그림자로 작용한다는 것...

줄리어스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집단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줄리어스를 걱정하며, 조금씩 조금씩 가슴을 열고 자신을 개방하는 모습들, 드디어 냉혈한이었던 필립이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때... 줄리어스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25년전에 자신이 실패했던 내담자가 자기안의 고통을 직면하며 눈물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치료자로서의 보람과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이미 죽음은 극복한 상태였던 그였기에.... 기꺼이 할일을 하고 떠나는 자의 편안함을 느꼈으리라.

필립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을 경멸하며 벌레취급하던 팸이 자신의 손을 잡고 위로를 건넬 때, 상처난 응어리를 풀고 용서의 악수를 청할 때 필립은 다시 태어난 기분을 느꼈으리라. 진정한 영혼의 안식이란 바로 그런게 아닐까.

이책에 대한 느낌들....내게 너무 큰 울림과 가르침을 주었다.
집단상담에서 내담자를 대할 때, 문제에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어떤 피드백을 주어야할지... 좋은 치료자가 되기 위해서 줄리어스의 용기와 사랑, 배려를 배워야 한다고...

이 책 정말 멋진 책이다.
쇼팬하우어에 관한 책들도 찾아 읽을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이 더 잘 이해될 것이고, 필립의 심경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필립과 비슷한 문제를 안고 고통받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상담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