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계의 선배로부터 소개받아 '백탑파 시리즈' 전체 6권을 한꺼번에 사서 연말연초에 만사 제쳐두고 독파했다.

 

 일단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역사공부가 부실한 나로서는 정조시대를 추리소설로 대하면서 많은 교양을 쌓은 것 같다. 추리소설이지만 3부작 모두 쉽게 사건을 흐름을 예측하기 어렵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도 그 속에 역사적 주장과 진실이 들어있는 데다가 양념으로 가끔 인간의 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가 최근 한국사회 10년을 돌아보면서 소설을 생각한 것 같은데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지만, 전혀 다른 시대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개혁과 진보를 주장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 정조시대와 같은 실패가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탑파 시리즈'는 작가 김탁환(1968년생, 연대 국문과졸)이 조선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임금 정조와 '북학파', 그리고 주류 '벽파(공맹파?)'들간의 개혁을 둘러싼 갈등을 소설로서 보여준 작품이다. 작가는 '백탑파' 3부작 시리즈-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를 통해 사실적으로 그 갈등과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백탑파'는 영,정조시대 탑골 백탑 아래 모여 시문을 공부하고 세상과 경제를 논한 지식인 모임(우리가 국사 시간에 아마도 이들을 '북학파'라고 배운 듯...)이다.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을 핵심으로 하여 연경(북경)여행을 통한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고 북학을 나라늘 구할 중심사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부분 참여자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당상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정조의 정치개혁과 분화혁신을 충실히 보필하였다. '백탑'이란 종로 3가 탑골공원 내에 위치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이야기한다.(국보 제2호, 세조 13년/1467년 건립, 높이 12M 3층 3기단부 10층, 최하단 그림)

 

 3부작은 동일한 당시 의금부 도사 직책을 가진 주인공 이명방이 각기 다른 사건(살인사건과 열녀문 실사)을 통해 당시 개혁을 위한 정조의 노력과 '북학파'들의 도전, 그리고 '공맹파'의 역공을 생동감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조대왕을 신경써서 공부하거나 알아보지 않아서 그렇지만 '백탑파 시리즈' 3권을 통해본 정조는 영원히 합쳐질 수 없는 두 가지 이상, 즉 공맹지도와 실사구시를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에 개혁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조대왕이나 당시 '북학파'를 포함한 사대부들이 박노자씨가 이야기하는 '공맹지도'의 원래 정신과 철학이 아닌 명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를 발전시키기 보다 퇴보시키는 철학을 국가운영과 사회철학으로 받아들인 이상 실사구시와는 함께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당시 조선의 사회구조나 정조대왕의 등극이 다분히 정상적이지도 않았고(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벽파들은 당시 세손이던 정조까지 죽이려 했으며 정조 등극 직후 궁궐에 정조를 암살하려는 암살자도 있었음) 이미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기 시작한 시기라고 보면 정조대왕의 노력도 인정해 줄 수는 있지만...

 

 3부작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은 실학만이 조선의 살길이라 결심했고 정조가 결국 왕위를 중심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고 공맹지도를 버리지 않음을 알면서도 백탑파가 군왕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전제했다는 것이다. 18~19세기 유럽의 세계사를 보면 혁명이나 극도의 개혁세력이 없이는 중세시대 봉건적인 군주나 체제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 백탑파가 단순히 군왕에게만 개혁을 주문할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조직을 꾀하는 것이 현명했을 것 같다.(물론 유럽과 달리 조선은 삼면이 바다라 쉽지는 않겠지만 일제시대 항일운동한 것을 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듯...) 너무 결과론적인 평가인가???....ㅎㅎㅎ

 

 3부작에는 주인공 이정명과 이정명의 친구(1평 '방각본 살인사건'에서는 처음 만난 사이지만...)이자 '백탑파'의 하나인 김진, 그리고 정조대왕과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 이덕무가 3편 모두에 나타난다.(홍대용은 3편에서는 죽은 것으로 설정) 즉, '백탑파 시리즈' 3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인사건을 쫒는 의금부 도사와 친구의 활약'을 소재로 하여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조시대의 개혁에 대한 노력과 갈등, 그리고 성과와 좌절이 나타난다. 소설에서도, 역사적으로도 정조의 '개혁'은 실패하고 마는데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세심하게 따져보는 것이 아마도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상황에도 도움이 될성 싶다.

 

 '백탑파 시리즈'에서 특이한 것은 문체('단어'인가?)인데, 소설 속에 모든 출연자들을 호와 자를 사용하여 호명하고 고어체(국어사전에는 나오지만 현대에 와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단어)를 명사, 형용사, 동사, 부사로 사용하여 서술하였기 때문에 처음 1편 '방각본 살인사건'을 읽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중국어이나 일본어, 그리고 영어에서 따온 여러가지 현대의 단어보다 어찌보면 더욱 운치있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기초한 단어들이 생각보다 엄청 많다는 것을 알면서 그런 말과 단어들이 사장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작가가 고어체를 사용한데 대해, 그 용기와 노력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2008년 2월 2일]

 

 (방각본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