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문학 걸작선> 그 제목만으로도 묵직함이 느껴진다.
물론 종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막상 여러가지
보도와 일련의 현상들을 맞닥뜨리게 되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도 어려워지는 '종말', 게다가
스티븐 킹을 비롯한 명성있는 작가 22인의 서로 다른 관점과 견해들이 담긴 <종말문학 걸작선>이라면
당연히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엮은 존 조지프 애덤스는 존 발리의 <맨해튼 전화번호부>를 인용하며 종말문학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인류가 모두 멸망한 황무지를 방황하거나, 약탈자들로부터 가족을 보호마며 캠벨의 돼지고기 통조림을
  징발해 먹는 이야기들엔 어딘가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물론 끔찍한 얘기이다.
  당연히 죽은 이들도 슬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은 늘 생존과 새출발을 갈망하며,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 혼자만
  살아남기를 은밀히 기대한다.
  종말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총 2권으로 구성된 선집 중 1권에는 12편의 SF 종말 시나리오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첫번째 작품'의
선정 이유에 대해 엮은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고자가 유명작가이거나, 작품 자체가 탁월하여 강한 정서적 인상을 남길 경우, 그리고 다른 작품의
기조를 결정한다고 여겨질 경우 등에 해당되는 작품을 그 첫번째로 선정하게 되는데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은 셋 모두에 해당된다고 말이다.
그러니 그 기대감은 더욱 급상승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정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작품은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 이다.

애틀랜틱 리치필드 회사의 버클리 구덩이에 사는 야생견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파올로 바시갈루피의
소설은 동물원에나 가야만 개를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이 모래를 주식으로 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세상을

그려냈다.

신체개조기술의 발달로 방사능조차 인류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미래에 용케 살아 남은 '진짜' 개
한마리를 구조한 사람들은 마냥 신기하고 놀랍기만 한데, 막상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개를 잡아 먹느냐,
아니면 비싼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개를 키우느냐 하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해지고, 결국 마지막 결정을
내리게 되는 이야기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러나 그동안 이러한 장르의 소설을 접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단순히 '종말' 문학에만 관심을 두었지,
SF나 판타지가 결합된 소설이라는 점을 간과한 부분이 없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 책은 예상보다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SF영화라면 아무리 생소하고 기괴하더라도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게 책으로 쓰여진 SF소설이 되다보니 상황은 많이 달랐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총 85개의 주석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용어와 낯선 미래의
모습들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건데, 물론 SF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많이 다를 수
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SF적 상황들을 조금만 빨리 캐치해 낼 수 있다면 <종말문학걸작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종말'이 시사하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넓은 우주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는데 분명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동물들이, 혹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어도 나 혼자만 살아남기를 은밀히 기대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2권에서는 또 어떤 색다른 발상의 소설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