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 <싱크홀>에 이어 세번째로 접하게 되는 이재익 작가의 8번째 장편소설 <아버지의 길>은 2권 짜리 방대한 역사소설이다. 2005년 방영된 <SBS 스페셜-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그것을 진작 봤었더라면 이 책에 대한 감동이 얼마나 더 깊어졌을런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2004년 도깨비뉴스에 '이 한 장의 사진 :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속 주인공의 기구한 사연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영된 이후 그것은 다시 이재익 작가의 손을 통해 소설로 재탄생하였다. 무려 4년에 걸친 취재와 집필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라고. 방송국 PD인 화자(話者)는 탈북자와 관련된 추석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김건우라는 폐암말기의 탈북 노인을 만나게 된다. 삼대에 걸친 일가족이 탈북을 시도했으나 할아버지만 살아 남아 탈북에 성공했다고 하니, 프로그램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던 것인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노르망디 코리안'이었던 것. 김노인의 아버지 김길수는 물론이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사람들의 사연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조선 신의주, 아내 없이 8살 아들 건우와 살고 있는 대장장이 김길수. 떠나버린 아내의 빈자리를 메워 주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던 그였는데, 아들에게 인사 한마디 못한 채 만주행 징병열차에 태워지고 만다. 엄마였고, 형이었고, 선생님이기도 했던 세상의 전부였던 아빠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아이 건우, 그리고 난리통에 어린 아들을 혼자 남겨둘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은 또 오죽했을 것인가.   한편, 서자로 태어나 열등감 속에 살다가 일본 유학 후 군국주의에 빠져들어 친일을 선택하고 현재 조선인 징병을 지휘하는 김상우라는 본명의 스기타 대위, 농사도 지어야 하고 아픈 엄마도 돌봐야하는 형 대신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다는 14살 영수,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온 정미소 배달꾼이었던 정대, 음악공부를 위한 돈이 필요해서 자원한 짜즈보이 신경식, 위안부로 끌려온 명선, 그리고 이들과는 달리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독립군 소속의 붉은 여우 월화까지. 그들 저마다의 사연들이 마음 아프지만, 그중에서도 조선에서 만주로, 러시아로, 독일로, 프랑스 노르망디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견뎌내야 했던, 아들을 위해서 절대 죽을 수 없었던 아버지 김길수의 끝도 보이지 않는 긴 여정을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런지 할말을 잃게 되는데, 무엇보다 그의 이동 경로와 함께 세밀하게 묘사된 2차세계대전은 그야말로 생생해서 전쟁을 겪지 않은 독자들을 참혹한 전쟁터 한 복판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소설 <아버지의 길>은 끔찍했던 2차세계대전를 치르는 동안의 세계정세를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또 한사람의 아버지를 기억한다. "나에게는 조국도 이데올로기도 두 번째다.  나는 처자식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재우는 일이 첫 번째로 중요하다. 나는 민족을 배신했다.  그러나 영혼을 판 대가로 가족들에게 집과 끼니를 줄 수 있었다.  나는 심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라고 말했던 또 다른 아버지.  나는 그를 쉽게 욕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갖가지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어서라기 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하는 현실은 너무 끔찍하지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