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박범신은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여러권 접해보진 않았다. 그가 이 책에서도 꼬집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작가의 책을 겨우 한두권 쯤 읽거나 소장 했을 뿐 모든 작품을 소장하며 읽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분명 박범신이라는 작가의 글을 좋아하지만 그의 모든 작품을 읽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세권 째 그의 책을 손에 들었을 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겨우 몇권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 마치 그 작가의 모든 것을 아는 양 알은체를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노릇이고, 창피한 노릇이다.

이 책은 이적요라는 유명 시인이 사후에 공개하게 한 노트에서 시작 된다. 그 노트엔 그가 자신의 제자를 살해했다는 자세한 내용과 자신이 사랑한 한 소녀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또 한권. 그가 죽였다던 바로 그 제자 서지우에 의해 쓰여진 일기가 있다. 두권의 일기는 서로 반복되며 이야기를 끌어 간다.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에 서있던 그녀 은교. 이적요에겐 평생에 단 한번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 였고, 마지막 희망이었으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여자 였으나 그를 죽음으로 한걸음 더 다가서게 만든 여자이기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엄습해 왔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17세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적요.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 나이를 먹으며 지혜가 깊어지고, 생각이 깊어 간다. 그러나 육체의 나이가 정신적 나이를 훨씬 앞서간다. 나는 여전히 20대의 싱그러움과 발랄함을 간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데, 내 육체는 너무 빠르게 늙음을 향해 질주를 하고 있다. 내 영혼이 느끼는 나이와 내 육체가 보여주는 나이는 점점 괴리감을 더해간다. 예순을 넘긴 이적요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자신의 영혼은 여전히 맑게 깨어 있고 건강한데 자신의 육체는 말라 비틀어진 고목처럼 남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 절망감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

이렇게 책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접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분명 노망난 노인네의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얼굴이 찌푸려지는 상황이 틀림 없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도 적령기가 있는 것 처럼, 잘 맞는 적당한 상대가 있는 것 처럼 믿고 살아 간다. 그 균형이 깨지면 얼굴을 찌푸리고, 손가락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며 그들을 일탈한 족속 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자라버리는 사람도 있고, 맘보다 몸이 먼저 늙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건 솟아날 수 있고, 그 감정이 진실한 것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 이것은 맞는 것이고, 저것은 틀린 것이라는 규격은 어디에도 없다. 사랑은 규격품이 아니니까 말이다.

은교가 없었다면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의 관계는 나빠지지 않았을까? 그렇진 않았을꺼라 생각 된다. 이적요가 서지우의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들의 관계는 살얼음을 걷듯 불안하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집착만큼 미움도 커졌을 것이다. 태산처럼 커보이는 이적요를 사랑하면서도 질투하는 서지우. 서지우에게 은교는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남긴 노트에 은교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스승인 이적요에 대한 복수의 감정이 불러온 착각이 아니었었나 싶다. 자신에게 문학의 길을 걸을만한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그 길 위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머뭇 이적요에게 기대어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 처량해 보인다. 자신이 쓰지도 않은 소설을 홍보하고 다니며 우쭐해 있는 그는 점점 껍데기 뿐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맞지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은 안스럽기까지 했다.

이적요 시인은 그의 노트에 자신의 시는 껍데기 뿐이라고 모두 가짜라고 이야기 한다. 욕망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에게 은교를 향한 자신의 욕망은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은교를 알기 전 자신이 쓴 시는 가짜라고 말하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다름을 그는 은교를 통해 배운 것이다. 그에게 은교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처름 만나보는 세상인 은교에게 그가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은교를 품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누르며 아파했을 이적요 시인에게 서지우는 분명 죽이고 싶은 정적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바라보는 것 조차 아까운 그녀를 그는 갖어버렸으니 말이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 은교를 만났던 그 시간이 더 소중하고 값지다고 말한다. 그에게 은교는 무미건조한 그의 삶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 였을 것이다. 은교를 향한 그의 애뜻한 마음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죽음이 멀지 않은 그에게 그 감정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을까? 깊은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이 책도 소설 '도가니'처럼 영화가 만들어진 후에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박해일이 어떻게 이적요 시인을 표현해 낼지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