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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정신 (213~215 페이지에서 발췌편집)


삼십 년 전 기억 하나, 

하굣길 버스 안이었다.

또래 여중생들이 탔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도 까르르 웃는다는 소녀들이었다.

10대 소녀 특유의 고음이 버스 안을 시장통으로 만들었다.

하굣길 버스 안의 일상적 풍경이었으므로 조금만 견디면 될 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난리였다.

그러나 그날의 소란은 조기종영되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 옆자리의 아저씨가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야, 이 XX들아. 조용히 못 가!"

순진한 시대보다 더 순진했던 소녀들은 입을 삐쭉 내밀 뿐 이내 조용해졌다.

고요를 찾은 버스 안은 좋았지만, 다시 잠에 빠진 아저씨의 막말은 미웠다.

그때 다짐했다.

"나는 늙더라도 이런 꼰대는 되지 않을 거야."



2008년 6월의 기억 하나.

늦은 출근길 버스 안이었다. 맨 뒷좌석 구석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어느 정거장에서 남녀 고교생이 탔다.

내 옆에 앉은 그들은 쉴 새 없이 ’씨바’거리고 ’졸라’거렸다.

’하하호호’하며 서로 얼굴과 손을 어루만졌다.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고민했다.

’한마디 할 것인가, 그러다가 모욕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지. 요즘 어린 애들이 드세다던데. 그냥 참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흘끔 째려보는데 그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나도 모르게 고함이 튀어나왔다.

"너희들, 조용히 안 해? 책을 볼 수가 없잖아!"

당돌한 시대보다 더 당돌한 아이들은 다행히도(?) 속삭임 모드로 전환해줬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이 눈에 안 들어왔다.

이런 생각만 맴맴.

’반말은 왜 하는데? 욕만 안 했을 뿐, 30년 전 꼰대와 너는 뭐가 다른 거야?’





그 사건 이후로 내 ’깜빡’ 생각이 주제는 꼰대였다.

아니, 정확히는 꼰대 정신이었다.

부쩍 늘어난 잔소리에 14살 딸아이가 "아빠가 꼭 할아버지 같아"라고 핀잔을 줄 때도,

점점 길어지는 월례회의 훈계에 직원들이 지루해할 때도 꼰대 정신이 깜빡하고 떠올랐다.

생각이 굳어지면 안 되는데,

나이가 많다고 후배를 가르치려 들면 안 되는데,

내가 처한 위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 하면 안 되는데, 라고 자조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즈음에 광우병 촛불이 켜지면서 내 꼰대 정신은 아직 젖도 안 뗀 것임을 알게 됐다.

병 걸린 소는 안 된다고 외치는 여중생들에게 나이 어린 것들이 뭘 아느냐고 호통치는 꼰대들.

잘못된 것 고치자고 광장에 왔다는데, ’배후’와 ’괴담’ 운운하는 꼰대들.

우리 꼰대 형아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꼰대 정신이며, 전문적 심리용어로는 페스팅거가 말한 ’인지부조화’라 하는 것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제 편한 대로만 생각한다는 그 불치병.



소는 광우병 안 걸리게 잘 키워야 하고, 40대로 접어든 성인들은 꼰대 정신 안 생기게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소녀들에게 속으로 부탁했다.

’세상의 소녀들아, 촛불로 광우병만 태우지 말고 나와 내 주변의 꼰대 정신도 불태워줘. 활활, 아주 깡그리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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