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귀신의 소원 (경상도 아랑각 ) - 첫번째 이야기 



깊은 밤이다. 세상이 모두 잠든 것 같다. 

휘익, 휘익.

바람이 휘파람을 분다.

덜컹덜컹.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는 도망친다.

밤하늘의 공기가 집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춘다. 태풍이 오려나 보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겼다. 바람 소리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안방에서 아빠가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아빠는 이미 깊은 잠에 빠졌나 보다.

덜컹덜컹.

창문이 또 한 번 심하게 흔들린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꼭 닫아걸려고 다가갔다.

그때였다.

끼익, 끽.

창문이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세찬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창문 틈 사이로 시커먼 것이 들어왔다.

“히익!”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시커먼 것은 창문 틈에서 바닥으로 기어 내려왔다.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헤친 채 엉금엉금 기어 왔다. 하얀 한복을 입었다.

나는 얼른 침대 밑으로 도망쳐서 납작 엎드렸다.

쿵덕 슥, 쿵덕 슥…….

시커먼 것이 치마를 질질 끌며 침대 밑으로 다가왔다. 머리카락이 출렁출렁 흔들렸다.

그리고 순간! 그 시커먼 것이 침대 밑을 들여다봤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보였다. 입가에는 새빨간 게 묻어 있다. 시커먼 것은 손을 쭉 뻗어 날 잡으려고 했다.

 

 "누나! 왜 이래요! 장난하지 말래니깐!”

시커먼 것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놀랬니? 뭐 이런 걸로 화를 내고 그래.”

시커먼 것은 머리카락을 훌쩍 뒤로 넘겼다. 아랑 누나였다. 아랑 누나는 처녀 귀신이다.

“밤에 찾아오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나도 잠 좀 자야지.”

“심심해서 그래. 할 일이 없어. 그러니까 남자 친구 한 명만 소개시켜 달라니까.”

“허걱! 누가 귀신을 여자 친구로 해요? 그리고 누나 나이가 지금 몇 살이에요?”

“나, 열아홉 살!”

아랑 누나는 귀여운 척 주먹으로 자신의 두 볼을 비볐다.

“그건 죽을 때 나이고. 지금 몇백 살은 됐죠?”

아랑 누나는 입술을 뾰로통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나한테는 귀신 남자 친구도 소개시켜 줄 수가 없어요. 머리는 풀어헤치고 다니고, 잘 씻지도 않고, 입술은 날마다 뭐 묻히고 잘 닦지도 않고……. 더러워서 누가 사귀려고 해요?”

“어머나! 아까 떡볶이 먹고 닦고 온다는 게 그만!”

누나는 한복 소매로 아무렇게나 입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엄청 예쁜 얼굴이었거든? 동네 남자들이 나만 보면 다 침을 질질 흘렸어. 칫!”

아랑 누나는 삐친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내가 참빗 하나만 있어서도 이런 꼴로 안 다녀. 넌 어떻게 그렇게 구박을 할 수 있니. 흑흑.”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요. 내가 요즘 신경이 좀 예민해서 그래요.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았거든요.” 

 

“흑흑, 그래도 그렇지. 난 생각보다 쉽게 상처 받는단 말이야. 흑흑. 참빗만 있었어도 내가 이렇지는 않을 텐데…….”

아랑 누나는 아예 침대에 벌러덩 누워 울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참빗 구해다 주면 되는 거죠?”

“정말이야? 구해 줄 거야?”

“인사동 같은 데 가면 구할 수 있겠죠, 뭐. 기다려 봐요. 중간고사 끝나고 사러 갈게요.”

나는 발로 누나를 밀면서 침대의 이불을 끌어당겼다. 누나는 다시 엉덩이로 이불을 밀치고 들어왔다.

“근데…… 참빗을 나한테 줘도 소용없어.”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귀신한테 물건을 주려면 귀신이 죽은 제삿날에 그 물건을 태워야만 해. 내가 죽은 제삿날에 제사를 올리고 참빗을 태워야만 내가 가질 수 있는 거야.”

“아후,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해마 도령, 내 제사는 해마다 음력 4월 16일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열려. 해마 도령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꽤 유명한 처녀 귀신이거든. 밀양에서는 아랑제라는 큰 잔치를 열어. 음식 솜씨 대회, 글짓기 대회, 서예, 그림 대회 등등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솜씨를 뽐내지. 밀양에는 나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지어 놓은 사당도 있어.”

“누나가 그렇게 유명한 귀신이었나요? 왜요? 왜적을 물리친 장군도 아니고.”

나는 아랑 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면 예쁜 얼굴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큰 잔치를 벌일 리는 없었다.

“궁금하지? 듣고 싶지? 알고 싶어서 속이 바짝바짝 타지?”

누나가 약을 올렸다.

“네.”

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얘기해 줄 테니까 내 제삿날에 참빗을 꼭 태워 줘야 해. 약속!”

 

      귀신들의 지리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