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어릴 적에 문방구에서 팔던 '독서기록장'엔 내가 책을 읽고 써야 할 것들이 이미 쓰여져 있었다. '책제목, 지은이, 읽은 날짜, 줄거리, 느낀 점'이란 글자가 굵게 쓰여져 있었고, 이미 칸칸이 나뉘어 줄이 쳐져 있어서 그 빈공간을 채워넣으면 되었다. 그런데 줄거리를 설명하기 힘든 책이라면 어쩌지? 그 칸을 비워두어야 하나? 이 책, 『파크 라이프』처럼....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쓰여진 소설이 아니다. 그냥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독자앞에 그려낸다. 그리곤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런 소설들의 설명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구들이 있다. '현대인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드러낸',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무미건조한 문체를 통해 객관적이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등등.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스토리라인이 무척이나 복잡한 소설을 좋아하는 경향이 다분한대도, 이상하게 이런 소설에 가끔 손이 간다. 그건 아마,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엄청난 사건 하나 없이 유유히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터트리는 한방 때문인 것 같다.

계단 중간에서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힐 끝으로 계단을 몇 번인가 가볍게 찼다. 그녀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옆얼굴을 바라보자, "흥"하고 코에서 숨을 내뿜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갑자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더니, 고개를 휙 쳐들어 나를 바라보며 "좋아. ......나, 결정했어"라고 중얼거렸다. (p.114 - 『파크라이프』)

이렇게 한방을 찾아내고, 온몸이 찌릿하는 느낌을 받게 되면, 어김없이 또 이런 줄거리를 설명할 수 없는 소설을 찾아 헤매게 되는 거다.

이 책에는 요시다 슈이치의 두 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파크라이프』와 『플라워스』. 먼저『파크라이프』. 주인공 '나'는 거의 매일 찾는 공원에서 '스타벅스 여자'를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식'이라는 건, 이미 예전부터 그와 그녀가 각각 공원에 자주 들렀지만 그때서야 그가 그녀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스타벅스 여자는 이미 예전부터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전부터 우다가와 부부의 맨션에 매일 드나들면서 그들의 애완원숭이를 보살펴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일상, 스타벅스 여자, 우다가와 부부, 공원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주인공 '나'와 마리코는 고향에서 올라와 도쿄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음료수 배송회사에 취직한 '나'는 그곳에서 '간단'을 알게 된다. '그 사람, 모치즈키 간단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첫눈에 그에게 빨려들었다.'라는 소설의 첫문장대로, 『플라워스』는 '나'가 간단을 알게 되며 일어나게 되는 일들과 감정들이 줄거리를 이룬다.『파크라이프』보다는 『플라워스』가 좀 더 극적인 분위기를 띠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느낌일 뿐, 그렇다고해서 여느 소설들처럼 뚜렷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콕 찝어내기란 쉽지 않다.

텔레비전 볼륨을 올리면, 빈 라덴도 부시도 파월도 샤론도 아라파트도 뉴스 해설자도 어려운 말들을 쏟아놓았고, 마치 그 말들이 사고를 낳고, 거기서 태어난 사고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소리를 지워버리면 인간의 사고 따윈 온데간데없고, 다만 걷고 안고 눕는 인간의 몸뚱이밖에 안 보였다. 빈 라덴의 야윈 몸이 무슨 나쁜 짓을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반대로 건강한 부시의 몸이 뭔가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소리 없는 뉴스 영상에서는 왜 그런지 몸뚱이만이 부당한 피해를 당하는 듯했다. (p.66 - 『파크라이프』)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 갖는 집중력에 가끔 놀라게 된다. 큰 파도없이 잔잔히 흘러가기에 읽는 당시에는 흘려버리기 쉬운 것들도, 다 읽고보면 놀랍도록 하나를 향해 모이고 있다. 바디용품을 판매하는 주인공 '나'가 공원일대를 케이크처럼 예리한 칼로 가운데를 잘라서 표현하는 것도, 우다가와 부부의 집에서 다 빈치의 <인체해부도>를 꺼내보는 것도, 길거리의 상점에서 인체 모형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리고 '몸뚱이만이 부당한 피해를 당하는 듯'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하나로 모여 주인공 '나'가 된다. 모두 하나로 모여 표면, 즉 몸뚱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음소거시키면 몸뚱이와 사고를 분리해낼 수 있다. 내 자신의 몸뚱이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몸뚱이를 나쁘게도 만들고 건강하게도 만드는 사고 또한 점검이 필요하다.

책의 꼬리표★

내 손에, 2010. 9. 7 (노블마인)

시작, 2010. 9. 17

끝, 2010.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