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1년에 한 번씩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두 번 똑똑, 그게 전부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입니다. (p.9)

이미 다른 책을 끝까지 다 읽은 터라, 앞부분만 살짝 읽으리라 마음먹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아넬의 소녀들』은, 첫문장부터 나를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다.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어렸을 때 읽었던 마녀가 나오는 동화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소설이었다.

"과거는 평생 따라다니는 걸까?"
(....) "아니면 벗어날 수도 있는 걸까?" (p.132)

혼자 간직하고 살아가는 비밀이 있는가? 혹, 그 비밀이 된 사건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지는 않았는가? 내게도 비밀은 있다. 가족,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둔 비밀이.... 하지만 내 비밀이 된 사건은, 내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그 이유를 곰곰이 되짚어보면, 어릴 적 일이라 그 무서움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크고 난 지금, 종종 비슷한 뉴스를 TV나 기사를 통해 보게 되면 그때 일을 떠올리게 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사건이 나를 타겟으로 하여 다가와 부딪쳤지만, 운좋게도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비켜 지나갔기 때문이다. 가끔, 무의식적으론 영향받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세 자매(엘브, 메그, 클레어)는 엄마,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서로를 알았기에, 범죄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이 발생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건의 처음 타겟은 클레어였는데, 엘브가 그것을 목격하고 클레어를 구한 채 자신이 사건에 휘말렸다. 클레어조차 그날 엘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 엘브의 나이는 11살, 클레어는 8살이었다. 엘브는 그 비밀스러운 사건 후, 세상에는 '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악령이 이리저리 날뛰는 세상을 증오하며,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아넬의 세계였다. 새로운 언어인 '아넬 말'을 만들어 두 동생과 의사소통을 했다. 세 자매의 엄마인 애니는 점점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게 변하는 세 자매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엘브는 또다시 악과 맞닥뜨릴 때를 대비해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악한 것들을 경험해서 그것들에 무뎌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녀를 떠올리게 하는 까만색의 옷차림, 맨발, 밤마다의 외출, 이상한 소문들.... 엘브의 흔들림을 멈추게 할 것은 무엇일까? 과거는 평생 따라다니는 걸까? 아니면 벗어날 수도 있는 걸까? 벗어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일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과거의 한 사건이 삶의 방향을 나쁜 방향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면(그래서 마치 악령이 내 삶에 붙어있어서 훼방놓는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그 말은 즉, 어떤 사건들로 인해 삶의 방향을 다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왜 앨리스 호프먼을 '매직 리얼리즘의 마술사'라고 부르는 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넬의 세계를 신비롭게 그려내어 판타지소설이나 동화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키지만 결코 현실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결코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가지 않기에, 책을 읽으며 슬픔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후련한 마음으로 마지막줄까지 읽어내자 나도,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과거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또 다시 과거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