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남일은 '첫 줄부터 오싹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이럴 수도 있구나!'생각했다고 했다.

 

말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p.9)

 

그를 소름끼치게 한 첫 줄이다. 나는 이 첫 줄에서 고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은 마지막줄을 읽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글들은 쉴 새없이 그 때의 상황을 재현하는데, 그래서 아주 많은 일들이 담겨있는데도 소리를 죽인 발자국소리나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 듯한 고요함을 넘은 적막감.... 이 고요와 적막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었다.

 

조선은 전쟁없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 평화롭던 시절에 준비를 해놓았어야 했겠지만, 원래 사람이란 것이 잃고서야 깨닫는 바보같은 면이 있다.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가 끝이 아니었다. 패배는 또 다른 굴욕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그 수많은 굴욕의 하나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이 되어 청에서 살게 되었다. 이 책, 『소현』은 소현세자의 마지막 2년을 담고 있다.

 

조선의 세자가 조선과 가까이 있지 않고 청과 가까이 있게 된 시간이 8년. 조선의 소식은 귀를 통해 듣고 글을 통해 알았으나, 청의 성장은 눈으로 본 시간도 8년. 그 아득한 시간동안 소현이 알게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청은 소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느껴야 조선으로의 환국을 허락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편이 된다면 조선에서 세자의 자리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청이 소현을 자신의 편이라고 믿는 한편 조선에서는 소현이 명의 편이라 믿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그러기에 8년은 너무 길었다. 소현이 조선을 귀와 글로 안 시간은 곧, 조선에서도 소현을 귀와 글로 안 시간이었으니까.

 

 

"전쟁은 곧 끝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이 남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섭정왕의 물음에 세자가 곧 대답하지 못했다. "정치가 남을 것이니 누구에게도 영원한 안식은 없을 것입니다." (p.311)

 

난 소현에게 '그래도 영원한 안식을 얻었으니 그곳에선 편안하지 않습니까.' 하는 되지도 않는 위로밖에 건넬 수 있는 것이 없어 슬프다. 한장 한장 책장을 넘겨갈수록 소현, 봉림, 흔, 석경, 막금에 대한 정은 켜켜이 쌓여만 가는데 그들은 여전히 고요하여 슬펐다. 그가 환국해서 혹시 청에서 있을 때 보다 더 깊은 고독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 슬프고, 그가 결국 몸 속 가득 품은 울음을 풀어내지 못하고 죽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슬펐다.

 

'이제 상상력은 독자 여러분들의 몫이다'라는 저자의 말에, 책장을 덮고서도 한동안 멍하니 그를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글귀의 출처는 『소현』(자음과모음, 2010, 초판7쇄)이고,
본 포스팅의 글귀와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래의 저작권은 저작자(출판사)에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