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건지, 없다 생각하니 그렇게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요즘이다. 자기 전에 펼쳐들면 몇 장 못 읽고 자고, 그래서 몇 시간 앞당겨 읽으면 잠잘 시간도 안되었는데 졸기 시작하니...^^;; 그래서 해를 넘겨버린 녀석,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이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주인공이 어느새 자라, 사랑을 하게 되었다. 2편에 해당하는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3권과 4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 3권은 1부에 속하는 '스완 부인의 주위에'다. 제목 그대로, 2권에서 '오데트'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스완의 사랑하는 여인이 이젠, 스완부인이 되어 등장한다. 주인공은 스완과 스완부인의 딸인, 질베르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질베르트를 좋아하는 마음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사랑중이었을 때의 스완을 떠올리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데트와는 다르게 질베르트는 주인공을 사랑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첫 장을 펴면, 1부의 제목 밑에 이런 소제목이 붙어있다. '인물 성격에 일어나는 방향 전환과 변화/ 노르푸아 후작/ 베르고트/ 내가 한때 질베르트와 안 만나기로 한 경위, 이별이 일으키는 비애와 망각의 고르지 못한 진행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 소제목치고는 꽤나 긴데다가, 결코 '간단'해보이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3권의 내용의 깔끔한 정리라 하겠다. (하긴, 작가가 직접 쓴 요약이니 당연하겠지만..^^)

주인공 '나'는 질베르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주인공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스완부처는 사랑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우연한 계기로 상황은 급반전되어 주인공은 스완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질베르트의 태도도 한결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원래, 시련과 고통은 예기치 못했던 혹은 안심하고 있었던 곳에서 찾아오나보다. '스완부처'라는 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정작 사랑은 질베르트와 주인공의 마음문제라는 것을 잊었는지, 질베르트의 마음이 '나'에게서 시들해지자, 돌이킬 수 있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랑을 할 때,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모조리 담기기엔 사랑은 너무나 크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 쪽으로 방사되어, 상대의 한 표면에 부딪혀 저지되어, 본래 방사점 쪽으로 퉁겨져 돌아온다. 그처럼 우리 자신의 애정이 퉁겨져 돌아오는 반동을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이라고 일컫는데, 간 것보다 돌아온 것이 더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간 것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p.261)

이 말은 '나'의 입장에서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질베르트 입장에서는 내보낸 사랑은 거의 없었으나, '나'에게 돌아온 사랑은 너무 큰데다가 매혹적이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문장이지 않는가. 게다가 '나'를 포함한, 받는 사랑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공감가는 말일 듯하다.

	질베르트의 몸 속에 깃들여서 그 빛을 그녀의 양친, 그녀의 집안에 방사하면서, 나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그 야릇한 실체가, 오래지 않아 그녀의 몸에서 빠져 나와 다른 몸에 옮아가리라고는, 나는 상상조차 못 하였다. 사실 동일한 실체이다. 그러나 나에게 전혀 다른 작용을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병이라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몸에 감미로운 독물도, 해를 거듭하여 심장의 저항력이 줄었을 때에는 전처럼 견디지는 못하니까. (p.219)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만은 마치 죽을 것처럼 아파하는 게 사랑이다. 참 묘한 병이다. 마음 한 켠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상하게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첫사랑의 기억이 오래가는 이유는 '나는 상상조차 못 하였다'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인 듯 아팠고, 잊혀지고 옮겨간다는 상상조차 못하였던 풋.풋.함. 시간은 사랑했던 그(그녀)를 감정의 동요없이 볼 수 있게 해준다. 빛이 그(그녀)에게서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실체인 '사랑'을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그렇게 새롭고 다르게 다시 시작한다.

3권에서 '나'의 사랑이 주된 줄거리이긴 하지만, 주인공이 그동안 책을 읽으며 동경해 마지않았던 베르고트를 만나는 광경도 퍽 인상적이다.

	그런데 내 앞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 버린 한 발의 연기 속에 여전히 프록코트 차림으로 서 있는 요술쟁이처럼 내 인사에 답례하고 있던 사람은, 달팽이 껍질처럼 생긴 붉은 코에 검은 턱수염을 기른, 부드러운 맛이 없는 키 작고 허리 굵고 근시안인, 아직 그다지 나이 들지 않은 남자였다. (p.174)

그런 베르고트의 모습에 주인공은 '죽을 지경으로 슬퍼졌'는데, 나는 어쩐지 이 부분을 읽으며 쿡, 웃음이 났다.. 어떤 작가의 책만을 읽고, 혹은 음악만을 듣거나 목소리만 듣고 한껏 상상해놓은 이미지들이 막상 직접 마주하게 되는 한순간 날아가버리는 경험과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 너무 공감된다.

무지개빛 책등을 한번 스윽~ 훑어보며 4권을 보니, 헉--+. '나'의 사랑의 결말 확인을 위해서는 3권보다 훨씬 두꺼운 4권을 펼쳐 들 용기가 필요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