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답답해진다. 책을 덮는다. 찬 바람이 어깃장 놓으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쉬고 있는 서늘한 베란다로 나간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하다. 베란다 창문을 활짝여니 그제야 찬바람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내 볼과 가슴에 마음껏 부빈다. 가슴이 후련해 진다.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선물을 받았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라는 책이다. 우화집이라며 건네는데, 표지를 보니 자그마하니 빨간 원숭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책이다. 책을 펴 보니 만화책이다. 만화책이라고 하면 좀 너무 심한가? 그림책이다. 책을 읽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느긋하게 내용을 음미해가며 세 번을 읽으니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이 책은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20개의 우화가 실려 있다. 처음에 나오는 갑옷도시는 6쪽으로 21줄의 글이 있다. 한 줄이래야 다른 책에 비하면 반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림이 있어 더욱 재미있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갑옷도시는 온통 쇠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갑옷에 대해서만 얘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한 노인이 우산을 쓰고 갑옷을 입지 않은 맨 몸으로 나타나 비가 올 것이고, 비가오면 쇠는 녹이 쓸어 사람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노인이 미쳤다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왔고 쇠가 녹슬어 도시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사람들도 움직이지 못했다. 노인이 사람들을 구해주고 삶의 지혜를 설파하려는 순간 녹슬지 않는 갑옷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모두들 그 갑옷을 사러 달려간다.

이 내용은 혹시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이나 고성능 게임기는 컴퓨터를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집단최면인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틀을 정해놓고 그 틀 속에서만 살아가라고 하는 세상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 아닌가. 어린 학생들이 산으로 들로 마음껏 뛰놀며 자연을 느껴야 함에도 오로지 진학이라는 틀 속에 틀어박혀 옴짝 달싹 못하고 학교와 학원만 오가야 하는 로봇과 무에 다를까. 또 우리는 과연 컴퓨터라는 괴물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하나에 싫증날 때가 되면 새로운 것을 들고나와 우리의 마음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컴퓨터에 중독되면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서 구할 수가 있는 것일까. 또한 쓸데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갑옷일 것이다.

불행한 소년의 이야기도 있다. 커다란 아파트 옆에 있는 판자집에 불행한 소년이 살고 있다. 아이들이 놀리고 때리자 몽둥이를 들고 복수를 하려고 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참으라고 한다. 청년이 되어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짐꾼이 되어 열심히 일했으나 수입은 쥐꼬리보다 작아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어려워 할 때마다 천사가 나타나 “다른 사람들도 다 걱정거리가 있다. 저 사람들이 불쌍한 것이다.”라고 하며 격려해 준다. 나이가 들어 늙어서 다 쓰러져가는 단칸방에서 죽어간다. 죽어가면서 깨닫는다. 천사가 평생 나를 속인 것이라고.

이 천사는 진정 천사인가 악마인가. 불행한 소년은 힘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참으라고 하는 천사는 누구인가. 크게 보면 국가일수도 있고, 작게 보면 가진 자 일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말에 최면에 걸려 오로지 참고 사는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일 수도 있다. 정말 참는 것만이 능사일까 의심이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가 왼뺨을 때리면 마저 오른뺨까지 때리라고 대어주라고 하셨으니, 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그게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행한 소년의 그 불행한 인생은 누가 책임지고 보상할 것인가. 단순히 불행한 소년의 인생이니 스스로 책임지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만 요구하고 생각하게 할 것이 아니라 비록 불공평 할지라도 많은 데서 덜어서 없는 곳으로 나누어 주어 불행한 소년이 좀 더 잘 샐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느 마을에 거인이 마을 사람들과 서로 협조하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거인의 몸집이 점점 커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몸을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사람들의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파손되었다. 오줌을 시원스레 누면 홍수가 나니 오줌도 제대로 누지 못했다. 거인의 몸집이 커질수록 지켜야 할 규칙도 많아졌다. 그러다 어느 날 거인의 생각이 홀연히 바뀐다. 내가 큰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작은 것이라고. 그러면서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 사람들이 고통이 너무 커서 서로 조심하며 같이 잘 살아보자고 수없이 부탁하며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인은 거절하고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왕처럼 군림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이상 거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괴물이라 불렀다.

이 야기를 읽으니 대기업과 SSM이 떠오른다. 대기업과 작은 하청업체, 동네슈퍼와 전통시장, 그리고 SSM. 정말 서로 공생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언젠가 들은 이야기다. 대기업의 과장과 하청업체 사장이 재미있게 얘기하다 회사 수익률로 화제가 옮아갔다. 수익률이 3.5%라며 자랑하고는 많이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음 해에 하청업체 명단에서 제외가 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하청업체들의 수익률은 3.0% 이하였다고 한다. 하청업체의 수익률이 높으면 그만큼 대기업의 납품단가가 높은 것이니 원가절감 차원에서 하청을 주지 않은 것이다. 하청업체나 중소기업에서 정당하게 원가를 절감하고 기술을 개발하여 수익률을 높이 것도 잘못인 것일까? 그러면 누가 기술을 개발하고 원가를 절감하려고 할까.

어느 날 조물주가 무료함과 외로움에 지쳐 개를 만든다. 조물주를 즐겁게 해주던 개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이 무료해 졌다. 조물주는 개들을 위해 돼지를 선물한다. 개들은 돼지를 사냥하며 즐겁게 지냈다. 돼지들은 매일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죽어 나갔다. 이러한 고통과 두려움에 지친 돼지들은 조물주에게 고통을 이길 무언가를 부탁한다. 조물주는 돼지들에게 망각과 웃음이라는 두 가지를 선물한다. 이제 돼지들은 여전히 고통 받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그래서 죽어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단다.

우리 서민들이 퍼뜩 떠오른다. 대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어려운 일에도 불구하고 적은 임금으로 힘들게 살아가지만, 딸린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어쩔 수 없이 변변히 항의도 못하면서 그냥 잊으며 또 웃으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 불행한 소년에게 나타나는 천사와 같이 참고 살라고 한다. 웃으면 행복해지는데 왜 웃지 않냐고 하면서. 행복해야 웃는 것인가? 아니면 웃으면 행복해 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자족해야 행복하다고 한다. 이러한 말도 이 글에 비추어 보면 의심이 간다. 정말인가? 하고. 이렇게 피동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할 것 같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냥 웃기만 하던지.

이 책을 읽으면서 꽤나 공감이 갔던 부분이 “까마귀”이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까마귀들이 어느 날 빨간 머리깃털을 가진 까막딱따구리가 나타나자, 딱따구리의 빨간 벼슬이 너무 부러웠다. 빨간 단풍이 든 나뭇잎을 따다가 머리에 꼿고 다녔다. 시큰둥 하던 까마귀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동화되어 모든 까마귀들이 빨간 나뭇잎을 머리에 꼿고 다녔다. 얼마후 꾀꼬리가 나타나자 또 꾀꼬리의 모양으로 치장을 하였다. 모두들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장닭이 나타났다. 붉은 벼슬에 몸통의 색깔에 멋있는 꼬리에 정말이지 너무 멋있었다. 부지런한 까마귀들이 먼저 치장을 하였다. 게으른 까마귀들은 멀리까지 가서 먹숨을 걸고 치장할 거리들을 구해와야 했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닭처럼 꾸몄다. 그런데 나뭇잎을 너무 많이 달아 몸이 무거워져 날기도 힘들었고, 잠을 자는 사이에 다른 까마귀가 훔쳐갈가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전에는 먹고 놀다가 남는 시간에 몸을 치장했는데 이제는 치장을 하다가 잠시 시간을 내서 먹이를 구해야 했다. 늘상 지쳐있고,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전보다 행복하지 않은, 닭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까마귀들 앞에 공작새가 꼬리를 쫘악 펴고 나타났다.

이제 까마귀들은 어찌 해야 하는가. 까마귀들이 공작새와 같이 몸을 치장하려면 닭의 흉내를 내던 것의 몇 십배의 공을 들여야 할터인데. 닭의 흉내를 내는 것도 힘이 들어 먹이를 구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공작새의 흉내를 내려면 아예 먹이 구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의 연예인들을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자연미를 간직하고 있는 연예인들도 많겠지만 대부분 성형수술을 해서 모두가 비슷비슷한 구석이 많다. 어른들이 보시고는 잘 구분을 못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성형수술을 하는 것은 더 예뻐지려고 하는 것일게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감이 결여된 것은 아닐까? 물론 치료차원에서 하는 성형수술도 있다. 그러한 수술은 적극 권장할 수도 있고, 의료보험 혜택도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도하게 하여 시신경을 건드려 눈이 보이지 않는다던지, 턱을 잘못 건드려 턱관절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다던지 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정도의 과도한 수술이나, 과도한 수술비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등의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동물들을 빌어서 얘기하고 있지만, 어디 동물들의 이야기일까. 그 행동과 내용이 풍자하는 교훈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라고 하며 얘기하고 있지만, 아마도 저자는 “이제는 없어야 할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가위바위보와 같이 공정한 게임인 것 같지만 아주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하기도 하고, 새들의 말과 같이 자기들에게 불리할 때는 닭을 보고 새가 아니라고 하고, 자기들에게 유리할 때는 닭을 새라고 우기는 작태, 농장의 일꾼들 처럼 주인이 가장 싼 임금으로 일하는 사람의 임금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것도 서로 시기질투하여 올려주지 못하게 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남이 땅을 사면 배아프다는 생각 등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정말 공정한 것이 무엇이고, 우리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아! 이제 시원하다. 밤바람이 불어와 답답한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 언젠가는, 누구든지 깊은 밤 홀로 시름에 잠길 일이 없는 좋은 세상이 오겠지. 우리 모두가 힘쓰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누가 무어라 하든 늘 희망은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희망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유일한 선물이니까. 이제 밝고 희망찬 내일을 위하여 몸을 누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