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이 사람의 책. 아마 처음 읽는 게 아닌가 한데... 영화로 더 유명해졌고. 정작 책으로는 조용하다가 영화 이후 오히려 조명받는 현실이 씁쓸하다고 한마디 했던 작가.

 

하여간. 소설가는 다 천재다. 소설을 그냥 소설로 읽어낼 수는 없어서 억지로 풀이를 해본다.

 

주요 등장인물 세 명(시인, 제자, 여고생)은 모두 정서적 결여가 있는 인물들이다.

 

*이적요 – 소년의 정서를 가진 늙은 시인. 결과적으로 보면 욕망에 가장 충실한 인물. 자신만의 ‘처녀’ 은교를 범해선 안된다는 욕망을 마침내 지켜낸 그 자체가 놀라운 욕망 아닐까. ‘욕망을 억눌어야한다는 욕망.’ 그리고 죽어서 남긴 노트로 문학판을 흔들고 대중을 조롱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렇게 하려고 했던 사람. 순수함은 무서움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지우 – 공대출신 문학능력이 저급한 제자. 상대적으로 젊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직하고 성실한 인물. 스승의 천재적 재능에 기대어 소설도 쓰고 마침내 작품을 훔치고 강박에 시달린다. 스승에 대한 열등감, 존경, 사랑과 은교에 대한 사랑, 질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마침내 죽음으로 내달리는 인물.

*한은교 – 말랑말랑하고 쾌활한 소녀. 두 어른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랑을 한 몸으로 받는 아이이면서 엄마같기도 한 복합적인 캐릭터. 결국 두 남자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혼자 남게 된다.

 

- 곳곳에 나오는 문학적인 표현이 참 감탄스러웠고.(작가는 약간 시인의 입장에 기울어진 듯)

- 늙은 것이 ‘일방적으로 욕먹어야 할’ 죄가 아니란 건 진즉에 알았지만.

- 나는 그럼 어떻게 늙어야 할지. 참 숙제가 커졌다.

- 욕망을 가진 인간들은 서로 얼마나 기만하고 있을까. 또 자기 자신을 체념시키고 현재 가진 것들을 지키려고 용을 쓸까. 그리고 후회하고.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고. .. 젠장.

- 시인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남으로부터 규정당했다고 했는데 나도 궁금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생으로서 나는 진짜 나인가. 조합된 나인가. 그런 척 하는 나인가.

 

58. ‘그 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켜졌다’

86. 불길은 이내 활활 번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을 통째로 태울 것이다. 어쩌면 나까지도.

130.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인 이적요는, 불측不測했던 세월과 교활한 전략과 거짓 관념으로 도배질 된 추상의 어휘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멋대로 조합되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250. 노인은 ‘기형’ 이 아니다. .... 노인은 자연일 뿐이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