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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온통 그 속에 빠져들어서 웃고 울고 지지고 볶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 속에서 진탕 놀다 나온 기분일 때가 있다. 그 속에서 빠져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내가 그 속에서 얼마나 잘 놀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책은 수시로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와 비교하게 하고 내 현실을 점검하게 하는 그런 책이 있다. 안톤 체홉의 소설은 후자였다.

처음의 낯선 느낌. 소설의 스토리에 너무 의지하고 살았던 독서법에서 자꾸 질문하고 있는 체호프의 소설은 많이 불친절하다. 내 내면의 소리를 수시로 들어 봐야하는 현실 앞에 나는 자꾸 쪼그라든다. 내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도사리고 있는, 어떤 확신도 무의미함이 존재한다는 명제 앞에서. 그 많은 도사림 중에 왜! 무의미함이었을까? 그 내면의 목소리는 오직 고요히 나 혼자 감당해야할 몫이 된다.

작가와 작품은 시대 안에서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시대를 통해서만 작품을 이해하다 보면 모든 해석이 천편일률적으로 갈 때가 있다. 시대가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는 나만의 독법으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체홉 식으로 말하자면, <대부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체홉의 글은 활자 그대로 읽을 수가 없다. 그의 글 속에는 진한 역설적 요소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체홉은 생계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는 의학부 대학을 졸업하던 1884년부터이고, 문학적 세계관이 바뀌는 시기는 1890년대 마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사할린을 여행하면서 부터다. 3개월간 유형지의 실태를 조사하고 해로로 동중국해, 인도양,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는 여행과 그 이듬해 남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른바 멜리호보 시절의 작품들로 칭하는 1892년의 작품들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 책은 안톤 체홉의 단편선으로 1883년 작인 <관리의 죽음>과 1885년부터 1887년 사이에 쓰여진 소설 <거울> <드라마> <베로치카> <티프스> <내기> <미녀> 등의 작품과 1891년 이후에 <베짱이> <공포> <주교>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엽편소설 관리의 죽음. <1883년 작>

희극적인 요소의 백미이며 그가 얼마나 역설적 요소를 잘 사용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풍자가 보여주는 아이러니. 그의 작품을 어떤 방향으로 읽어야할지를 잘 표현해 준다는 점에서 첫 번째 선정은 아주 유효했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파벨 바실리치는 유명 희곡작가이다. 어느 날 무랴슈키나예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의 희곡을 한 번만 들어달라는 눈물어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듣는다. 문제는 그는 그녀의 희곡을 전혀 듣고 싶지 않았고 그녀는 그에게 꼭 희곡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싶다는 거다. 그렇게 시작한 짧은 꽁트는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애달파지기도 한다. 꾸역꾸역 참는 파벨 바실리치의 행동은 코미디다. 그러다 아주 급작스럽게 참지 못한 “파벨 바실리치는 난폭하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슴속으로부터 치솟아 나오는 듯한 괴기스런 비명을 지르더니 묵직한 문진을 집어 들고 그것으로 무라슈키나의 머리통을 힘껏 내리쳤다.” 「날 잡아가라. 내가 그녀를 죽였다」그렇게 절규하는 그에게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 우리는 언제 그런 분노에 휩싸이는가? 그가 아무나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가 아닌 너무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 였다면..., 그가 어느 날 누군가를 죽이고 말았다면. 우리는 그의 선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 안에는 누르고 누르고 억눌린 자아가 분노에 사로잡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하루아침이 아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교육을 받고 살았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교육을 받아온 우리에게 감정을 키우는 일은 반란이나 불륜처럼 불온한 기운을 감돌게 한다. 누가 이 불온한 기운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쳤는가! 이성의 독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억압된 감정은 폭력성으로 똘똘 뭉치게 만들고 결국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할 때 감성의 문제를 따라가라. 억지로 살지 말아라. 그 분노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이성의 독재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감성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를 <드라마>를 통해 본다.

<베로치카>

‘여러분은 모두가 선량하고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에요’.... 여기서부터 독자에 대한 비아냥이 시작된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부조리한 가운데 있는지 말하기 시작한다. 인간에 대한 애매한 태도. 찬찬히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그 기묘한 상황.

미녀, 거울, 이런 작품도 비슷한 맥락으로 익힌다.

<내기>

이 작품 또한 흥미롭다.

돈 많은 은행가가 파티를 연다. 사회적으로 부유하거나 권태로운 자들이 모인 자리다. 그들은 사형제도와 종신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이 더 윤리적이고 인간적인가에 대한 논의 끝에 은행가는 사형을 옹호하고 젊은 변호사는 종신형을 택한다.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당신이 오 년 간 독방에 있으면 이백만 루블을 걸겠다고 한다. 변호사는 십 오년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이들의 내기는 시작된다.

은행가의 독백에 주목한다.

「무엇 때문에 이런 내기를 했을까? 변호사가 인생의 십오 년을 잃고 내가 이백만 루블을 얻는 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 일인가? 그것으로 사형이 종신형보다 낫거나 나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야, 아니야. 정신 나간 짓이야. 나로 말하면 권태에 지친 인간의 변덕이었고 그 변호사로 말하면 순전히 돈에 대한 갈망이었을 뿐이지.....」

독방에서 십 오년을 산 변호사는 돈을 거부하고 결국 떠났다. 은행가의 독백은 그로 인해 유효하지 않다. 결국 권태에 지친 인간의 변덕은 변호사였고 돈에 대한 갈망은 은행가였던 것이다.

결국엔 자신의 욕망 속에 갖힌 사람들..., 변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연민.

들추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망은 결국 자기 방식으로 감추는 느낌. 은행가는 법률가가 돈의 욕망에 무너지리라 생각하고 오만한 법률가는 은행가가 자신의 허영에 무너지리라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공포> 와 <베짱이>는 다른 듯하면서도 매우 닮아 있다.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공포는 시작된다.

드리트미 페트로비치 실린은 대학과정을 마친 엘리트이다. 그러나 좋은 직장을 버리고 지금은 농장을 경영한다. 외부적으로 봤을 때 그는 평범한 가장이고 다정한 아빠이고 자상한 남편이다. 그러나 그에겐 지침 남자의 모습이 그림자로 붙어 울고 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를 하지만 내일이면 벌써 내가 왜 그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돼요. ..... 친구 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두렵습니다. ....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삶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는 이 한 남자. 아내의 외도를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한 남자. 그럼에도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는 한 남자. 당시 지식인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간직한 이 남자. 싫다고 하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순된 삶의 모습

「그렇다면 삶에 대한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삶이 나를 짓누르기 전에 네가 먼저 삶을 부숴버려. 삶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란 말이야」

나(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에게도 불안감은 있다.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그 무엇’ 그것이 무서운 ‘나’는 떠난다.

이상의 ‘날개’를 읽는 듯도 하고 공선옥의 ‘수수밭으로 오세요’를 읽는 듯한 느낌.

<베짱이>

올가 이바노브나는 훌륭한 남편이 있으나 허영이 가득한 인물. 그녀는 허영 속에서만 남편을 사랑했다. 남편(드이모프)은 단순하고 건전한 사고방식과 선량한 성품을 지녔다. 이들에게도 건조한 삶이 있다. 아내의 행실을 외면하는 남편과 일상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아내. 결국 남편이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는 순간에야 알게 되는 인간의 오만함.

두 작품은 비슷하게 닮아 있다. 삶을 좀 제대로 봐라. 너 자신을 들여다봐라. <공포>는 겉보기엔 완벽하나 의미 없는 결혼생활에 대한 것이고 <베짱이>는 결혼을 하고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허영 가득한 인간에 대한 고발이다.

가장 가슴 아픈 소설은 <주교>였다.

작가가 죽기 2년 전에 쓴 소설.. <주교>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인 그를 생각할 때 이 작품 속 주교의 죽음은 예사롭지 않다. 인간을 사랑했고 인간의 삶에 가깝게 살고 싶어 했던 한 아이가 주교라는 높은 탑에 올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홀로 우뚝 서서 외롭게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절망감.

무언가 꼭 결론을 내야한다고 생각한 글쓰기의 시절이 있었다.

되지도 않는 도덕론과 정의론에 휩싸여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의 시절들. 체홉은 아주 간결하고도 위트 있게 그 허상에 대해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그 모순된 삶에 직면한 인간의 실체를 들여다보라고... 그 풍자적 삶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부조리함을 보라고 말한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삶의 이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