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혼란스럽다.
과연 내가 느낀 감정이 맞는 건지, 과거의 그 책이 맞는 건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김정현의 <아버지>를 읽은 건 이미 십 년도 더 된 중학교 시절이다.
언니의 권유로 읽게 되어서 결국 펑펑 울었었고,
그 후 영화를 보고나서도 펑펑 울었었다.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 깊이 깨달았다기 보단 그저 감수성 풍부한 어린 나이에
슬펐고, 또 슬퍼서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나서 문득, 예전에 읽었던 <아버지>가 생각이 났고,
결국 또 한 번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읽기 전까지 나는 또 한 번 몰아닥칠 슬픔을
대비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그 슬픔의 규모는 생각보다 너무나 왜소했고,
난 슬픔보다는 다른 감정에 휩싸였다.

나의 감정이 메마른 건가?
아니면 감성보다는 이성이 먼저 앞선 나이여서일까?
혹은 시대와 세상이 변해서일까?
20대에 만난 <아버지>는 아버지에 대한 모습을 그렸다기 보단
죽음 앞에 나약한 힘 없고 외로운 인간을 다룬 소설처럼 느껴졌다.
만약 이 소설이 정말 아버지를 그려내고 싶었던 거라면
난 아버지라는 존재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사실 난 <아버지>에서 아버지를 외면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이 더욱 더 이해가 됐다. 그건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냉정하게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소설 속 인물인 [정수]가 나의 아버지라고 상상해봤다.

그는 꽤 능력있는 사람이지만 인맥과 학력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좌절한다. 그 때문에 그는 무력감에 빠지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기를 선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서글픔과 억울함에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또 거의 대부분 주사를 부린다. 늘 술과 담배를 곁에 두고 손과 발도 씻지 않은 채
술냄새를 풍기며 잠들기 일쑤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지만 겉으론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점점 멀어진 사이를 보며 슬퍼하고 가끔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의 탓으로 미룰 때도 많고 그렇게 비틀어진 사이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포기해 버린 것이다.

만약 정말 이런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라고 생각해 보자.
과연 어느 누가 그런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할 수 있는지...
물론 처음엔 그런 아버지라도 연민을 느끼고 가슴 아파하겠지만
결국엔 모두 지칠 게 뻔하다.
소설 속에 그려진 [정수]란 인물은 아버지로 보기에도, 그리고 한 사람으로 보기에도
그다지 사랑받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작가는 억지로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다.

난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란 이름을 갖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자신의 가정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얘쓰고 있는 줄도 안다.
그렇기에 많이 부각된 모성애 못지 않게 부성애의 소중함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는 조금도 아버지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설 속의 아버지인 [정수]를 말이다.

결국 소설에서도 가족 그 누구의 뉘우침이나 노력이 아닌
[죽음]이란 극단적인 상황의 끝에 서고 나서야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한다.
죽음이란 것은 그 자제만으로도 너무나 커다랗기에 모든 것을 덮어버린 것이다.
난 그런 식의 가족의 화해와 용서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곧 죽기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슬프고 안타깝다는 이유로
그 전의 모든 불화가 한꺼번에 없어진다는 것은 결국 그 어떤 노력과 이해보다도
죽음이 지닌 화해의 능력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하는 거 외엔 설명이 안 된다.
과연 아버지의 존재와 그 분의 사랑이 죽음에 직면하고 나서야 느껴지는 것일까?
당연히 절대 그렇지 않다.

작가는 참으로 이기적인 방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게 작가의 본 의도든 그렇지 않든 독자의 입장에서 난 그렇게 느꼈다.
가족과의 화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미 모든 것을 놓아 포기한 아버지,
거기다 죽음을 내세워, 그 거대한 슬픔을 방패삼아 도덕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타락을 즐겨도 된다고 종용하는 주변 상황,  결국엔 죽음이란 이유로
불륜마저도 사랑으로 포장될 수 있다는 우스운 생각들.
난 그 모든 것들에 너무도 화가 났다.
정말 이 <아버지>란 소설이 그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어마어마한 사랑과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내가 이 소설에서 본 것은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죽음앞에선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란, 그리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분들은
절대 이 소설에서처럼 나약하게 죽음으로 용서받고 용서하고 가족을 지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