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도쿄 요쓰야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도쿄에 도착한 지 보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이곳 수도원 어른들과 옛 스승님들께 인사도 다니고 방도 정리하였습니다. 제 방은 수도원 구관 3층에 있습니다. 방이 넓고 천장이 높아서 시원합니다. 창문으로는 정원도 보이고, 아침에는 그곳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립니다.

제 방은 이곳 수도원 성당인 ‘쿨트하임(Kulturheim)’과 곧바로 이어져 있습니다. 쿨트하임 성당은 조치 대학교를 처음 세울 때 지어진 것이니 백 년은 됨 직합니다. 이곳을 처음 시작한 이들이 독일인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성당 이름도 독일어입니다. 쿨트하임은 번역하면 ‘문화관’ 정도인데, 1900년대 초 선교가 아직 자유롭지 못하던 정치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문화 행사를 구실 삼아 선교 활동을 하였고, 그래서 성당도 종교 색깔이 없는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성당에 앉아서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분들의 체취가 느껴집니다. 어떤 이들은 감사와 기쁨을 봉헌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삶의 애환과 고통을 하소연했겠지요.

이곳에 사는 동안 쿨트하임은 저에게도 삶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매일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감사와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세상의 죄를 아뢰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성당을 찾고 기도를 봉헌합니다. 저는 주로 신앙이 흔들릴 때 기도를 드립니다. 수도자가 신앙이 흔들린다고 하면 의아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말씀처럼 ‘가장 못된 유물론자들의 사상’이 종종 나를 덮칩니다. 그런 순간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라는 혼란스러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심지어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에도 이런 느낌이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저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엄청난 파도(마르코 6:48)와 싸워야 합니다.

이런 당황스러운 순간이 왜 찾아오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체험하였고,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는데도 저는 계속해서 이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평생 그대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평생 흔들리지 않고 계속되겠습니까? 몇 년 못 가서 그 마음은 흔들리고 이러저런 이유로 시련을 맞게 되겠지요.

성숙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처음 일어난 감정이 아니라, 살면서 찾아오는 시련과 위기를 겪으면서 이루어 내는 화해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이리도 약합니다. 간을 빼 줄 것 같다가도 금방 싫증을 내고, 친하게 지내다가도 상처를 주고 배반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 그런 약함에 무릎 꿇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위대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하고 용서를 빌고, 그리하며 삶을 다시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도 않으시니 우리는 의심도 쉽게 하고 상처도 쉽게 안겨 드립니다. 성서를 읽어 보아도 하느님의 사람들 중에서 하느님을 배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다가갔습니다. 시편 51편에는 이러한 인간의 기도가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하느님 제 안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심어 주십시오. 당신의 숨으로 나를 강하게 하고 새롭게 하여 주소서.”(시편 51:10)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춥고 어두운 밤도 보내고 비바람도 견디어 내듯이,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영적인 여정도 삶의 실의와 어두움을 딛고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조금씩 하느님께 다가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얻게 된 하느님과의 친밀함은 머리와 이치로는 계산할 수 없는 마음의 노고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님과 친구들이 곁에 가까이 있든 없든 그들이 우리 삶에 소중한 분들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멀리 있는 분이 아니고 가까이 계신 ‘당신’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크고 깊은 현의(玄義)는 우리 삶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내심으로 불안과 고독을 견디어 내는 인간 영혼 안에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현의의 드러나심은 아주 조금씩일 뿐입니다.
마음이 허공을 헤맬 때 저는 자연스럽게 ‘쿨트하임’으로 향합니다. 이곳에는 하느님을 찾았던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원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제 기도를 한숨 한숨 이분들의 것에 더합니다. 저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매일이 축복입니다>중 "신앙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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