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 소년』 편집자 노트

삶의 검은 웅덩이는 불시에,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편집자, 슬럼프 비슷한 것에 습격당하다

“웬만한 스릴러 못지않은 페이지 터너(page turner)”

어느 외신의 리뷰 중 한 문장이다. ‘자신의 장애 아들을 이해하고 싶었던 한 아버지의 여정’이라는 원서의 부제만 본다면 이 무슨 해괴한 소린가 싶겠지만... 이 책은 굉장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어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클리셰 그대로다. 처음 번역 원고를 받고선 한자리에서 후르르 읽어 제쳤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온몸이 찌르르. 이후 편집 과정에서도 읽을 때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나의 모골을 송연케 했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해서. 간혹은 웃기기도 했다.

작품 수준 높고, 번역 품질 훌륭하고, 외주 교정 & 내부 교정 순탄하고, 제목은 가제 그대로, 표지 시안도 대만족. 여기까지 읽은 업계 종사자(즉 편집자)라면 부러움에 섞인 탄성을 내지르리라! 이렇게만 진행된다면야 편집자란 천상의 직업이 될 게다. 내 인생도 그야말로 안락하겠지. 그러나 삶의 검은 웅덩이는 불시에,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우리를 덮친다. 이 책의 저자에게도 그랬고, (물론 그의 경우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내게도 그랬다.

때로 임신한 여자들이나 곧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을 법한 젊은 여자들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워커 같은 아들을 낳은 아버지 특유의 힌트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인 나를 확인한 그들의 얼굴에는 다시 경계심의 구름이 드리워진다. 일탈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기에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본문 145쪽)

흰 화면을 앞에 두고 그저, 하루 이틀 사흘

문제는 여유자적하며 최종 데이터까지 넘긴 후 찾아왔다. 보도자료만 얼른 쓰고 주말에는 엄청 뒹굴뒹굴해 주리라 큭큭 거리며 하얀 한글 화면을 창에 띄웠다. 어... 어... 쓰기 '시르다'? 보도자료 쓰기 좋아하는 편집자 없고, 보도자료나 소개자료에 까다로운 부키이지만, 시간과 공을 들이며 끙끙거리다 보면 어쨌든 쓰이고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흰 화면을 보면서 자꾸만 웹서핑을 하는 내 기분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언론사 릴리스까지는 닷새나 남았으니, 역시 임박 호르몬이 나와야 쓰나 보다... 하고 넘기기에는 뭐랄까 머릿속이 너무나 하이얬다. 너무 하얀 것은 뭔지 모를 오싹함을 품고 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갔다. 월요일 오전에는 보도자료를 출력해 책과 함께 릴리즈 업체에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토요일에도 출근한 보람 없이 ‘저장안함’을 클릭하고 달밤에 귀가했다. 정상이라면 목요일 늦게 콘돌에게 제출해 한번 퇴짜를 맞고 금요일에는 완성했을 텐데.

나의 투정 섞인 호소에 “네가 어떤 보도자료를 쓰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던 콘돌은 토요일 늦은 밤 “네가 어떤 보도자료를 쓰든... 나는 이제 잘 것이다”라는 문자를 남기며 ‘너가 지금 잘 때는 아니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했다. 그러나 일요일 해질녘, 이웃집 밥 짓는 냄새가 창 너머로 솔솔 풍겨오는 시간까지도, 보도자료는 두 문단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짜파게티를 끓여먹었다. 일요일이니까.)

총체적 난국!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물론 보도자료가 술술 쓰일 때도 있다. 몇 시간 만에 다 쓰기도 하고, 미루고 미루다 후다닥 해치우는 때도 있다. 그런데 뭘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아... 다른데 진짜 다른데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이건 차원이 달랐다. 나흘을 꼬박 붙잡고 있는데, 여전히 머릿속이 하얀 거다. 쓰기 싫다, 못 쓰겠다... 이런 건 둘째 치고 아무 얼개도, 줄기도, 분위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했는데 별로인 게 아니라, 그냥 하얀 거다.

가령 이런 거다. 평생 자전거를 타며 놀았고, 어제도 타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데, 어, 갑자기 자전거 타는 방법을 모르겠네?! 자전거를 탈 수가 없어!! 타임슬립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시간의 차원 틈에 끼이면 등장하곤 하는 텅 빈 공간. 그게 내 머릿속에 펼쳐져 있었다.

그 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짜파게티를 먹고 맥주 한 캔을 콸콸 붓고 나서 약 세 시간 만에 얼기설기 보도자료를 작성해 상사에게 메일로 전송했다. 피드백과 수정과 마무리 등등이 이어지고, 월요일 어찌어찌 제시간에 릴리스를 마쳤다. 그러고 다음 날인 지금 나는 이렇게 앉아서 주절주절 편집 후기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그건 뭐였을까? 그저 잠시의 슬럼프였을까?

일요일 밤 늦게 보도자료 마무리를 하고 다음날 릴리스를 위해 이른 시간에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한참 전, 미명에 문득 잠에서 깼다. 가만히 일어나 앉으니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달나라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삐져나온, 새하얀 표지의 칼같이 네모난 것. 갓 입고된 새 책. 순간 나는 무섭고 쓸쓸했다. 책 속 구절이 가만히 떠올랐다.

워커는 평생 지금과 같은 식일 것이다. 아들은 특히 나의 연약함과 공포를 상기시키는 존재라는 점에서 내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이런 나의 실패들을 인정한다.

『달나라 소년』을 읽으며 저자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내가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한없이 흔들리면서도, 그러나 묵묵히 ‘삶의 변칙’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태도에 더 오한이 났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을, 주위의 모든 것을 어떻게 대면하고 있나? 이 책에 몰입할수록, 나는 조금 겁에 질리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다 펑 하고 퓨즈가 끊긴 거다. 이런 순간이 내게만 오는 것은 아니리라. 삶은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를 지운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제각각 다른 형태로 변주되기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서로를 고립시킨다. 달처럼.

나누고 공감하고 연결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워커를 키우는 것은 물음표를 키우는 것과 같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아직도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할 때면 그것이 어떤 느낌이며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소리로 들리는지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부딪친 인간의 변칙, 인간 존재의 희귀하고 생소한 일면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내가 워커와 비슷한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워커가 태어나고 11년이나 지난 뒤였다. (본문 22쪽)

저자처럼 나도 내가 겪었던 ‘충격과 공포!’의 순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각자가 갑작스럽게 부딪히는, 크든 작든 관계없이, 삶의 허방이라거나 한계라거나 변칙 같은 것들에 대해 나누고 공감하고 연결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따뜻한 곳이 되지 않으려나? 한밤의 어둠 속에서 혼자 쓸쓸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으려나?

※

문득 잠을 깨보니 방은 캄캄했다. 고개를 들자 배갯머리에 하얀 사각봉투가 한 개 얌전히 놓여 있다. 왠지 철렁했다. 빛날 정도로 순백색의 봉투였다. 단정하게 놓여 있다. 손을 뻗어 주우려고 하자, 헛되이 방바닥을 긁었다. 아차, 했다. 달그림자였던 것이다. 그 마굴 같은 방 커튼 틈으로 달빛이 기어들어와 내 베개 맡에 정사각형 그림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꼼짝 않고 있었다. 나는 달한테 편지를 받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였다.

- 다자이 오사무 『나의 소소한 일상』 중에서

편집자 노트를 쓰다가, 이건 대체 뭘까 곰곰 생각하다가, 예전에 귀퉁이를 접어놓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떠올랐다. 역시 작가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같은 책, 역시 귀퉁이가 접힌 다른 페이지를 보니 이런 데 밑줄이 그어져 있네.

문장에는 좋고 나쁜 구별이 확실히 있다. 외모나 자태 같은 것이리라. 숙명이겠지. 어쩔 수 없다.

편집자 노트에서도 ‘멘붕’이 느껴지지 않나요? 울먹이는

부키 기획편집부 붉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