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은 어느 칼럼에서 “다 먹을 수 없게 차리는 것”을 한정식의 기준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선생의 책 『미각의 제국』에서는 한정식을 허영의 상차림으로 표현한 바도 있지요. 『세 PD의 미식기행, 목포』저자 손현철 PD 또한 이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손현철 PD는 한정식집보다는 목포의 진정한 밥맛을 느낄 수 있는 ‘백반’을 추천합니다. 다만 깜짝 놀랄 정도로 가격 대비 반찬 가짓수만 많은 백반이 아니라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백반’ 말이지요. 손현철 PD의 ‘백반’ 이야기 들어보시렵니까? <편집자 주>

 

한정식과 백반, 무엇을 선택할까?

한정식과 백반의 결정적 차이는 ‘밥’의 우선순위이다. 한정식에선 밥보다는 밥 이전에 나오는 전채와 주요리에 해당하는 지역 특산물이 더 중요하다. 밥은 맨 나중에 찌개, 굴비와 함께 차려진다. 그러니까 밥은 이미 온갖 산해진미로 입맛을 길들인 뒤 곡기 보충 차원에서 나오는 수준이란 말이다. 가뜩이나 배부른데 밥맛이 살아날 리가 없다.

백반은 다르다. 식단의 이름이 벌써 흰밥(白飯)이다. 그러니까 밥이 주요리고 나머지 반찬은 보조가 된다는 뜻이다. 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서양의 어느 요리에 ‘빵(Bread, Pain)’을 앞세운 것이 있는가? 서양 메뉴는 대부분 주요리 A에 빵이 ‘with bread’로 붙는 형식이다. 빵은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을 한다.

우리 조상들은 밥이 약이고 힘이고 생명이라 생각해서 밥을 많이 먹었고, 밥을 중심에 두고 반찬 식단을 짰다.

콩자반이나 고등어자반처럼 삶거나 구워 짭짤하게 절인 반찬을 ‘자반’이라 하는데, 그 어원이 재미있다. 조선 왕실의 의례 규범을 기록한 『의궤』를 보면 밥 옆에 차려지는 찬을 좌반(佐飯)이라 표시한다. 그 한자어를 풀면 ‘밥 먹는 것을 돕는다’는 뜻. 결국 반찬이란 밥의 섭취를 보좌하는 먹을거리다. 백반의 반찬은 밥을 많이 먹게끔 도와주는 보조 역할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주 열량을 공급하는 밥을 더 맛있게, 많이 먹게 하려고 다양한 재료와 조리 방식을 사용한 반찬을 개발했다. 밥과 함께 차려지는 국, 찌개, 반찬, 젓갈 등이 밥과 조화를 이루게 말이다.

 

좋은 백반이란?

좋은 백반이란 어떤 것일까? 반찬이 너무 튀지 않으면서 밥맛을 죽이지 않아야 하고 또 반찬들끼리 조화를 이뤄야 한다. 게장백반은 ‘밥도둑’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밥을 많이 먹게 하지만, 게장의 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반찬을 골고루 먹게 두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반찬 사이의 균형을 깨버린다. 사려 깊은 어머니가 어린 자식의 밥상을 차릴 때 편식하지 않게 골고루 반찬을 마련하듯 고기, 생선, 나물, 김치, 해조류, 젓갈 등등이 잘 안배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많은 반찬을 둘 이유가 없다. 끌리는 반찬 한 가지만 먹으면 되니까.

 

 

통운회관 백반

 (통운회관의 바지락 백반 상차림)

7천 5백 원짜리 바지락 백반의 반찬을 보자. 18가지 반찬이 육류, 어류, 패류, 야채, 나물, 젓갈로 골고루 분포한다. 소고기 육회와 돼지 삼겹살 수육, 고등어구이와 바지락탕, 파·배추·갓 김치 세 종류, 콩나물·토란줄기나물, 파래무침·미나리홍어무침, 멸치볶음·굴젓·갈치속젓, 풋고추와 된장. 어패류는 해안 도시답게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한다. 육류도 가까운 공급지의 상급 재료를 사용해 고급 고깃집의 식단에 처지지 않는다. 김치, 나물, 젓갈은 육류와 함께 먹으니 그 맛이 더 살아난다. 남도 다른 지역의 백반 반찬처럼 너무 간이 세지도 않고, 부드러운 느낌의 맛이다. 짜서 한 젓가락 들고 마는, 가짓수 채우는 장식용 반찬이 아니다. 알이 굵고 싱싱한 바지락을 심심하게 끓인 탕은 밥맛의 전체 균형을 잘 잡아준다. 어느 한 가지에만 손이 가는 여타의 백반과는 분명 다른 한 끼의 체험이다.

… 식단의 풍성함은 바다와의 접근 정도와 관련이 깊다. 목포의 백반은 산나물로 이뤄진 강원도나 지리산 부근의 산채 백반과는 대척점에 선 뛰어난 해양성 백반이다.

 

장산식당 보리밥 백반

 (장산식당의 서민적인 백반 상차림)

이보다 서민적인 백반을 맛보려면 목포여객선터미널 앞쪽 보리밥 골목으로 가면 된다. ‘여러 식당 중에도 골목 안쪽 장산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손맛이 좋다. 2008년 설날, KBS <다큐멘터리 3일>‘섬마을 귀향길, 목포여객선 터미널’편을 촬영하면서 명절 기간 동안 식사를 해결했던 곳이다. 몇 끼니 계속된 생선에 물려 돼지고기볶음을 주문하면 재료를 구해 차려주기도 했다.

평소에 이 식당은 제철 어류의 찌개나 무침을 안주로 막걸리와 소주를 기울이는 동네 사람들로 늘 붐빈다. 외지 사람이 선뜻 밥을 먹으러 들어가기가 주저스럽지만 일단 음식을 시키고 한 수저 뜨면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리밥을 시키면 기본 찬으로 김치 몇 가지, 야채무침, 어묵볶음 등이 깔리고 그날 들어온 생선으로 찌개나 구이를 해준다. 주변을 오가는 서민들 주머니 사정에 맞게 가격이 저렴한 조기나 간제미(노랑가오리)가 자주 식탁에 오른다. 특히 겨울부터 늦봄까지 많이 잡히는 간제미찌개가 일품. 된장을 풀고 고사리와 토막 낸 간제미를 넣고 푹 끓여 내는데, 고사리의 심심한 즙이 된장의 구수한 맛을 한결 부드럽게 해준다. 국물이 잘 배어들어간 간제미 살은 물결처럼 퍼들퍼들해진다. 혀 위에서 살의 결이 갈라지는 것을 느끼며 오독거리는 연골을 씹는 맛. 코를 톡 쏘는 삭힌 홍어를 질겅질겅 씹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미각 경험이다. 고슬고슬한 보리밥 한 그릇이 금방 사라진다.

- 『세 PD의 미식기행, 목포』 ‘한정식 안 부러운 백반’(손현철) 중 발췌 재구성

『세 PD의 미식기행, 목포』 는

관광지의 맛이 아닌 ‘맛보러 떠나는 여행’
그 첫 미행지味行地 목포
 
우리나라 맛 문화 1번지 전라남도. 그중에서도 ‘개미(갯맛)’의 집산지, 호남 맛의 진수라는 목포.

그곳에는 가슴 답답한 중년의 ‘힐링 푸드’ 홍어가 있고, 일제강점기 부두 노동자의 눈물이 담긴 콩물이 있으며,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조기가 있다.

베테랑 다큐 PD 세 사람이 근현대사 유적이 살아 숨 쉬는 목포 구도심을 거닐며 발견한 우리 맛의 속살.

역사와 추억이 깃든 우리 맛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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