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한 고통과 그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는 데에서 오는 간극은 쉽게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다.  짐작, 추측과 같은 행동은 타인의 불행으로 치부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파괴하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 인간의 감성을 메마르게 한다는 사실은 이미 지식이 되어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 이해란 녀석은 단지 짐작이고 추측일 뿐 내가 경험한 고통, 불행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 본 영화 「브라더스」에서도 전쟁으로 의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회복하기 힘든 상처가 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 전체의 삶의 균형이 깨질 만큼 무시무시하다.

이 소설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2010.4.30. 시공사)》는 과거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상도 받고 사진집도 낸 경험이 있는 유명한 사진작가 안드레스 파울케스가 주인공이다.  지금은 버려진 망루에서 전쟁화를 그리며 화가의 삶을 살아간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의 갑작스런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파울케스를 찾아온 낯선 남자는 과거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 스치듯 지나면서 찍었던 사진 속 인물로, 크로아티아 패잔병 이보 마르코비츠다.  느닷없이 나타난 방문자가 불편한 파울케스는 마르코비츠에게 왜 자신을 찾아왔냐고 묻는다. 

날 찾은 이유는 뭐요?

당신을 죽이려고요. p46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는 파울케스와 마르코비츠의 대화로 전개된다.  마르코비츠와의 대화를 통해 파울케스는 과거를 돌아보고, 독자는 그의 과거를 통해 파울케스가 이미 어두운 집에 살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오래 전 파울케스의 사진 속 주인공이 됨으로써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매한가지의 삶을 살아가게 된 마르코비츠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네가 참으로 어두운 집에 살게 되었구나. p78

전쟁 중 죽은 아들의 묘지 앞에서 어머니는 ‘네가 어두운 집에서 살게 되었구나’라고 기도 한다.  어두운 집은 말 그대로 빛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혹은 생명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기도를 삶의 열정과 꿈이 사라졌음을 함축한다고 이해하려고 한다.  파울케스와 마르코비츠의 삶처럼 말이다.

파울케스는 전쟁화를 그리기 위해 수많은 명화를 탐구하고 과거에 찍었던 사진들을 떠올려 보지만 분명하게 무엇을 그려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방문자와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벽화는 파울케스가 그리고 싶었던 모습을 가지게 된다.  비록 전쟁화를 완성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전쟁과 죽음을 그리고 싶었던 파울케스는 비로소 인간의 공포는 전쟁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시공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저자가 젊은 시절 종군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파울케스가 회상하는 과거에 등장하는 전쟁의 묘사는 허구가 아닌 실제 상황으로 느껴진다.  저자가 직접 경험하였기에 더 현실감 있는 표현이 가능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스페인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의 작품은 처음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조니 뎁 주연의 영화 「나인스 게이트」가 레베르테의 소설 『뒤마 클럽』을 스크린으로 옮겼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니, 약간 당황스럽다.  그래서 레베르테의 작품에 더 관심이 간다.  스페인 문학은 익숙하지 않은데 어쩌면 레베르테의 작품은 나와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은 좋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