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의 글은 참으로 순박하고 인간적이다. 조금은 길다 싶은 문장 속에서 세밀하게 풍경을 묘사하고 인간의 감정을 어느정도 자제력있게 묘사한 문장을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다보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그림이 때로는 어렴풋하게 때로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가끔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걸까 싶을 정도로 주어와 서술어가 뒤바뀌기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해서 어려울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단순하지만은 한 사람의 감정과 희노애락이 더 호소력있게 다가온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흑산'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생은 목이 잘리고, 또다른 동생은 땅끝으로 귀양을 떠나고 본인은 보이지도 않는 바다 끝, 흑산도로 출발하기 전의 정약전의 모습을 보면 허망한 마음과 함께 동정심이 모락모락 솟아 오른다. 99% 가공인물임이 틀림 없는 평안도 마을의 천한 마부(馬夫)의 이야기를 보면 순박하기 그지 없는 노총각이 회오리에 휩쓸리지 않고 편안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된다. 더불어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조선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천주교 신자들의 순박한 모습을 보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그저 꿈꿀 수 있게만이라도 기도하게 된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고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정직하고 순박하고 인간적인 작가의 필치. 이것이 소설가 김훈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고뇌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남한산성'에서는 조선 최악의 군주 인조를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신하들과 민초를 보여주었던 소설가 김훈의 또다른 작품 '흑산'을 택하는 데에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책을 펼치면서 이번에는 어떠한 세상을 독자들에게 보여줄까 하는 기대감이 훨씬 컸다. 역시나 기대에 저버리지 않게, 작가는 정약전, 황사영 같은 실존인물 뿐만 아니라 가공인물일 것으로 추정되는 마노리, 육손이, 김개동, 강사녀, 길갈녀, 아리, 박차돌 등 민초들의 고통과 슬픔, 소망에 대해서 생생하게 묘사해서 마치 그들이 눈 앞에 있는 것 같이 만든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처럼 분명한 것을 황사영은 어째서 두려운 비밀처럼 싸안고 소리 죽여 귓속말을 하는 것인지, 마노리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비에게 먼저 말을 걸 수는 없었다.....선비들이란 그렇게 뻔한 것도 공력을 들여서 생각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군왕의 정심(正心)은 만화의 근원이옵니다. 전하, 수신에 더욱 힘쓰시고 경연을 자주 베푸소서."

"대비(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자신의 그 다급한 말과 간절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소설 흑산의 주인공은 단지 흑산도에 유배되어 갇혀있는 정약전이 아니라, 천주교를 믿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였던 조선후기 천주교 신도들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명확히 알지 못한 것들을 천주교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자신 스스로의 자존감과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꼈던 그들은 당시 조선을 다스리던 기득권층에게는 자신들의 지배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대역죄인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19세기 초 국력은 점차 쇠진해지고, 민초들은 점점 피폐한 삶에 찌들어갈 때 나타난 천주교와 그 교리는 민초들에게는 작지 않은 희망과 정신적 위안을 주었을 것이 틀림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에 왕을 비롯한 대신들은 민초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 대신에 자신들의 성리학 이론을 공고히 하고 단순히 말과 자교만 내리고 있었는데, 작가 김훈은 소설 중간중간에 그러한 기득권층의 생각을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기득권층의 이론과 패러다임이 실제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과는 상당히 괴리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고 있다.

 

"발고가 형틀에 묶인 처삼촌의(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입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사영은 도피 중에 교인들에게서 들었다....황사영은 발고한 사람이 누구든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처삼촌들이 황사영과 많은 교인들을 발고한 대가로 매를 덜고 죽임을 면했다고 하더라도 황사영은 천주가 그 발고를 배신을 여기지 말기를 바랐다."

예전에 읽었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실학의 거두였던 정약용의 삶과 그 형제들(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그리고 정약전의 사위였던 황사영의 이야기를 접하였었다. 황사영은 실존인물로서 천주교를 믿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나이인데, 중국 천주교구에 조선으로의 군사적 공격을 통해서 조선이 새로운 나라로 나아가기를 꿈꾸고 신앙의 자유를 갈구해 마지 않았던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또한 실제로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믿는 사학죄인의 명목으로 형문을 당할 때 황사영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발고함으로써 황사영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이끌었었다고 한다. 소설 흑산을 읽으면서 황사영의 입장에서 서술한 작가의 관점 탓인지, 그를 발고한 정약용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소설에 서술된 대로 아마도 황사영은 자신을 발고한 처삼촌들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어차피, 세계 안에 머물러야 할 사람과 세계 밖의 세계를 꿈꾸던 사람이 가야할 길이 다를 수밖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과 그의 저서인 '자산어보'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지만, 정작 소설의 주요 내용은 정약전보다는 고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고 하는 대다수 민초들의 삶이었다. 생각했던 내용과는 다른 방향으로 내용이 전개되었지만 전혀 아쉬운 점은 없다. 오히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담담히 서술하고자 노력하였고 그것을 글로써 보여준 작가에게 고마운 점이 들 뿐이다.

 

 

 

Originally written by BlueMiR in http://blog.naver.com/bluemir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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