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2세기 지중해는 팍스의 시대였다. 로마제국에 의해 보장된 평화의 시대는 경제는 풍요로웠고, 방위는 탄탄하였으며, 모든 물산의 유통은 자유로웠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수도사가 예루살렘까지 순례 여행을 떠나는 데도 신변의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는 말그대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기독교가 유럽세계의 절대가치로 자리잡기 시작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은 476년 멸망 하였으며 로마제국이 있었던 자리에는 야만족 왕국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 동로마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천년을 더 존속하지만 과거의 로마 제국의 힘은 느끼기 어려웠던게 사실이고, 결정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인의 제국이 아니라 그리스인의 제국이라는 것이 제국의 정체성에 더 가깝다.

그러던 중에 서기 7세기 동방 오리엔트에서 생겨난 이슬람교라는 또다른 유일신교는 신흥종교가 가지는 폭발력과 아랍인들의 정복력이 맞물리면서 지중해 세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잡은 시기에 지중해 세계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가 이 길디 긴 제목의 서적이 설명하고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대적 배경이 된다. 그리고 결국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지중해 세계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점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또다른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오리엔트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시칠리아까지 휩쓸어버린 이슬람 세계에 있어서 지중해 건너편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서유럽세계는 '우상을 숭배하는 겁쟁이 개자식들'의 소굴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에게까지 알라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이슬람인들은 해적이라는 약간은 비열한, 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데, 서기 650년경부터 시작되어 서기 1000년경까지 계속된 이슬람 해적들의 출몰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연안의 기독교사회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 중세의 시기에 지중해 연안에 살고 있던 농민들은 갓 수확한 작물을 연례행사처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협당하는게 일상사였고, 살아남더라도 북아프리카로 끌려가 비참한 노예생활을 할 뿐이었다. 교회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반도 내부 깊숙히 자리잡은 수도원들도 육지에 상륙한 해적들에게 약탈당하고 불탔으며, 로마성벽밖까지 해적들이 출몰하면서 교황의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지배층들은 권력싸움 하기에만 바빴고, 명목상의 황제들은 살아남은자들에게서 세금을 착취하는 데 정신없었다. 이러한 중세 시대는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종말, 말세, 암흑과 동일어였고, 팍스 로마나는 저 먼 옛날의 추억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중에 한 명이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 직후의 새로운 작품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는 이렇듯 평화와 질서가 무너지고 암흑에 가득차있는 지중해(엄밀히는 중부 지중해)의 암담한 모습을 특유의 필치로 담담하게 서술해간다. 시오노 여사의 필체는 여전히 대단해서 마치 귓가에서 얘기해주듯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게끔 만든다. 또한 중간중간의 지도는 이슬람 해적들과 그들에 맞서는 기독교세력의 루트를 시각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든다. 역시 그녀의 필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나 할까? 시오노 나나미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주저없이 예약 구매하게 만들었던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는 다른 역사서적들이 흔히 다루지 않는 시기와 주제를 다룬다는 점만으로도 어느정도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아래 몇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첫번째로, 제목만으로는 중세 시대 지중해 세계 전체를 조망한 서적인 줄 알았는데, 上권에서의 서술의 무대는 이탈리아,시칠리아,남프랑스,튀니지 등 중부 지중해의 제한된 지역에 머무른다는 점이 일단 아쉽다. 지중해는 넓디 넓은데, 중부 지중해에만 서술이 머무르다 보니, 다른 지중해 세계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서적을 같이 읽어야 한다는 얘기.

두번째로, 중세에도 분명 유력한 정치체제와 국가가 존재했는데 그러한 유력한 세력들이 이 서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을 등에 업은 해적 세력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서술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점이 아쉽다. 프랑스 지역에만해도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이 있었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역에는 노르만왕조와 호엔슈타우펜 왕조, 그리고 각종 해양국가들이 있었으며, 동유럽에는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고 오리엔트에는 이슬람 칼리프 제국이 그 위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체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튀니지 지역에 자리잡은 이슬람 해적들이 과연 오리엔트에 있는 이슬람의 중심세력 과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쉽게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에도 언급을 하였었지만, 결코 다른 역사 서적들이 쉽게 다루지 않는 시대적 배경과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라는 걸출한 베스트 셀러 작가가 서술하였다는 역사서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서적을 구입할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 같다. 더구나, 下권에서는 上권보다는 보다 더 넓은 무대를 대상으로 많은 인물과 세력이 등장한다는 점은 상권보다 하권을 더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Originally written by BlueMiR in http://blog.naver.com/bluemir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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