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올려놓으면 휘는 기름종이 같은 불투명한 재질이
표지를 감싸고 있어서 뭔가 더 아련한 느낌을 주는 것도 같습니다.

기억과 추억, 첫사랑이라는 소재를 섬세하면서도 담백하게,
정말 딱 표지의 느낌대로 아련하게 그려낸 책입니다.

그래서인지 읽고 나서도 묘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기도 했던 책이구요.

 

 

첫 장편이기도 한 이 소설로 2002년 '제2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그 때의 심사평이 실려 있었습니다.

 

 

십구 년 만에, 그것도 새벽 2시에 걸려 온 전화.

"알겠어?"
단 한 마디만으로도 이내 유키코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 야마자키.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갑자기 오랜만에 스티커 사진을 같이 찍는 건 어떠냐고 물어왔습니다.
딸인 아야코가 스티커 사진을 모은다는 말과 함께 재미있을 것 같지 않으냐는 목소리에서
어쩐지 취기가 느껴집니다.

 

기억이라는 것,
한 번 만났던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헤어질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기억들은 잊혀진 게 아니라 잠시 묻어둔 거라
언제고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는 말로 처음 운을 띄웠던 문구처럼
이 소설은 유키코의 전화로 야마자키가 그녀와의 만남, 사랑, 이별,
그리고 그 만남으로 이어진 사람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전개를 보입니다.

자칫 어지럽게 느껴질 수 있는 전개지만 물처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삿포로에서 상경한 야마자키는 복잡한 도쿄가 익숙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구한 곳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헤매다 지쳐 들어간 찻집에서 유키코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울고 있던 유키코에게, 난생처음으로 모르는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건네게 되었던 건데
야마자키는 자연스레 자기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유키코가 왜 울게 되었는지도 듣게 되었죠.
예쁘고 붙임성도 좋아서 인기가 많은 그녀의 친한 친구인 이쓰코가
친구의 남자친구랑 자 버린다는 이야기였는데, 유키코의 남자친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날 헤어지면서 유키코는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후에야 성사된 첫 통화,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시작되었죠.

무기력한 대학생활을 하던 야마자키에게 유키코는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근무하는 문인출판을 연결해준 것도 그녀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묻는 그녀에게 딱히 없었지만 편집 관련 일이라면 하고 답했던 게 그 시작이었죠.
문인출판이라는 고지식한 느낌의 이름 때문에 철학이나 심리학 계통의 전문서적을 출판하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대표 잡지라고 건네받은 것은 <월간 이렉트(발기)>였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인상 좋은 사와이 씨, 그리고 그와 나눴던 이야기들,
유키코의 응원으로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사와이 씨, 그리고 와타나베 씨, 그의 부인인 사토코 씨와 두 딸 후유카와 아키나.
문인출판 부편집장인 이가라시, '신주쿠 풍속양' 기획을 하며 만났던 가나.
그리고 가나의 친구이자 현재 여자친구가 된 나나미까지.

마치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서로의 관계가 하나둘씩 밝혀졌을 때,
인연이라는 게 얼마나 놀랍고도 신기한 것인지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연과 운명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할수록 너무도 잘 어울렸던 유키코와 야마자키가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는데,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어쩌면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던 야마자키에게 조금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십구 년 만의 재회로 유키코의 현재 상황을 들으면서 씁쓸하기도 했구요.
지난날 그렇게 단호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던 그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쩌면 많은 사람이 그래 왔듯이, 후회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선택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직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는 물속에 건강한 물고기의 배설물로 좋은 박테리아를 만들어야만
수조가 완성되기에, 수조를 설치하고 제일 처음 넣는 물고기, 파일럿 피시.

물이 만들어지면 햇볕에 말려지거나, 산 채로 변기에 흘려지거나,
잡아먹히게 내버려지는 파일럿 피시들.
유키코는 그렇게 야마자키의 파일럿 피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문장들이 너무도 많이 나와 소장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내가 그동안 잊었던 기억들을 조금이나마 떠올려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