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증후군 상, 하   [누쿠이 도쿠로 저 / 노재명 역 / 다산책방] 

앞으로 한번쯤은 꼭 써 보겠노라 벼르는 많은 테마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복수’요, 다른 하나가 ’착한 사람들끼리의 싸움’이다. 

전자야 고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과 수많은 글쟁이들이 다룬 것들이어서 설명 없이 넘어갈 만하지만 후자는 흔히 접하기 힘들다. 요 근래 작품으로는 안드레 듀버스 3세의 『모래와 안개의 집(House of sand and fog)』(오프라 윈프리가 극찬하고 영화화도 되었다.)이 해당 테마를 가장 잘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는 한 집을 놓고, 그 집이 절실한 두 명의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악당이 아니다. 그저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 곁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들이다. 심지어 이 글을 읽는 당신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서로에게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주먹이 운다>는 또 어떠한가. 신인왕전 우승을 놓고 불량 청년과 퇴물 복서가 한판 붙는다. 청년은 갱생을 위해서, 퇴물 복서는 자신을 주위 사람에게 증명하기 위해 우승이 필요하다. 그러나 승자는 당연히 단 한 명. 관객들은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가? 누가 이겨야 하는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흔히 하는 것처럼 한쪽을 간단히 규정한 채, 다른 쪽에만 감정이입할 수 없다.


이처럼 난처한 상황이 바로 『살인 증후군』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처연한 꽃이다.

소설 내 배경은 이러하다. 현대의 일본. 아들을, 딸을, 아내를, 아버지를 뜻하지 않게 잃고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하필이면 가해자가 심신상실이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을 받아 버린 것이다. 가해자도, 가해자의 가족도 반성하지 않는다.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주위의 뜻 없는 호기심이 피해자 가족들을 난도질하는 사이, 법에 따라 가해자의 신분은 익명을 보장받는다.
거액의 배상금의 지급을 명령받으면 가해자 가족들이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할까 싶어 민사 소송을 준비하는 그들. 하지만 2, 3년 걸리는 과정 속에 가족들은 지치고, 변호사 선임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는다.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지옥이 따로 없다. 생령(生靈)처럼 졸아들어 살아도 산 게 아니고, 마치 허깨비처럼 마지못해 하루를 메워갈 때 피해자 가족 앞에 복수를 제의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 역시 가족을 잃었던 사람들. 피해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한편 경시청 산하 비밀 수사 집단에 소속된 전직 형사들은 청소년 보호법으로 보호받은 가해자들의 사망률이 정상보다 높은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수사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 청부를 맡긴 피해자들과 살인 청부를 실행하는 자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심지어는 일부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조사원 중 같은 사연이 있는 이는 아예 임무를 거부하고 잠적해 버린다.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저자는 연거푸 생명의 의미, 정의의 의미, 사적인 복수와 정의의 경계 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착한 사람들의 싸움’에서 ‘손에 피를 묻힌 착한 사람들을 계속 착한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자리를 움직인다. 독자는 하나의 대답을 선택하여 전체를 재단하며 응전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대답을 선택했건 가슴의 짐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씁쓸한 뒷맛은 계속해서 맴돈다.

알바니아는 15세기부터 카눈이란 관습법을 적용하고 있다. 카눈에 따르면 살인이나 상해를 당했을 시, 피해자 가족은 상대 집안에게 그대로 갚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이 ‘피의 복수’는 아들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에 복수와 관련 있는 가족들은 평생을 숨어 지내야 한다. 공산주의 시절 강력히 금지당했다가, 민주화 과정 속에서 공권력이 약해지면서 부활한 카눈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의 수만 현재 9800여 명. 그곳에는 살해를 우려해 태어나서 단 한번도 집 밖으로 못 나가는 아이가 있다.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하지만 옳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기는커녕 한숨을 쉬면서 속삭여야 하는 형편이다. 
당신이 선택한 답변은 어떤 것일지 무척 궁금하다. 

- <위대한 자들의 탄생> 저자 고경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