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보자. 당신이 새로 어느 팀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팀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팀의 고참 팀원이 당신을 찾아와 이렇게 제안한다. 당신은 새로 부임해 와서 팀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 그러니 얼마 동안은 팀을 실제적으로 자신이 맡아서 이끌어 가는 게 어떻겠냐고. 같이 온 팀원은 팀장 앞에서 이 고참 팀원이 팀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팀을 잘 장악하고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거든다. 게다가 이 고참 팀원은 조직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는 기대주이다. 제안을 빙자한 리더십에 대한 협박이자 도전. 자 당신은 햇병아리 팀장으로서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야구 감독> 초판본 표지
일본 프로야구에 야쿠르트 스왈로즈라는 팀이 있다. 현재 임창용 선수가 마무리로 활약하고 있어 최근 우리에게 친숙해진 팀인데 이 팀은 1949년 창단 이래 1975년까지 한 번도 페넌트레이스에서 1위는커녕 2위조차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1962년부터 1976년까지 15년 연속 승리보다 많은 패배를 기록한 최약체 팀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감독이 부임하면서 1977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 2위를 기록하고 이듬해에는 대망의 리그 1위에 이어 일본 시리즈까지 제패한다. 너무나도 만화 같은 스토리. 사람들은 만년 꼴찌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변화의 핵심에 신임 감독 히로오카 타쓰로의 리더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확정짓던 날 선수들이 히로오카 감독을 헹가레 치는 모습
<야구 감독>은 일본 프로야구 불세출의 명장 히로오카 타쓰로가 패배감이 만연해 있는 꼴찌팀에 부임해 어떻게 팀을 재건하고 리더십을 발휘하여 일본 제일의 프로야구팀으로 만들었는가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꼴찌팀을 최고의 팀으로 만드는 과정은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만만치 않다. 새로운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 조직원의 반발은 서론에 불과하고 트레이드를 통한 팀의 리빌딩을 둘러싼 구단주과의 갈등, 변화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위기 상황에서 흔들리는 리더에 대한 신뢰...
이러한 갈등들에도 불구하고 히로오카는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에 기초한 냉철한 판단,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선수들을 감독의 리더십 안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그리고 변화의 필요성을 자발적으로 인정한 선수들이 발휘하는 놀라운 잠재력은 하나의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낸다.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의 히로오카 타쓰로. 창단 4년 만의
팀을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야구 감독>이 일본에서 ‘스포츠 소설의 금자탑’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스토리의 강한 흡인력 때문이다. 이 책은 일단 손에 들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논픽션적인 배경 속에 픽션의 팀을 하나 끼워 넣은 탁월한 설정은 허황되지 않으면서도 야구를 소재로 빼어난 소설이 태어나는 것을 가능케 했다. 160킬로미터를 넘는 강속구도, 타자의 눈에서 사라지는 마구도, 모든 투수들의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솟게 만드는 천재적인 타자도 없이 야구 소설이라는 게 우리가 어린 시절 정신없이 읽었던 수많은 야구만화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줬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고 야구를 좋아하는 남성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책’이라는 네티즌들의 평은 이 소설의 드라마틱한 흡인력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덮고 난 뒤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건 도박에서 통쾌하게 이긴 승부사 히로오카 타쓰로의 리더십이다. 이 책은 리더십을 다룬 그 어떤 책보다도 리더십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히로오카가 처한 위기 상황 속에서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 독자라면 이 책의 모델인 히로오카의 리더십이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적잖이 유효하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닛타 지로 문학상 수상작 <F1 지상의 꿈> 표지
승부사란 도박을 거는 사람이다. 도박은 위험하다. 여기서의 위험이란 말은 불확실성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도박이 위험한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리더들도 그런 면에서는 도박사와 마찬가지다. 리더는 미래의 불확실성 속으로 조직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리더로서의 운명이다. 리더는 승률이 높은 도박을 걸 때도 있지만 만루에서 스리 번트 스퀴즈 사인을 내는 것처럼 위험한 도박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승률이 아무리 낮다고 하더라도 그 도박이 일생일대의 승부를 결정지을 때라면 우리는 그 도박을 피해 갈 수 없다.
이것은 비단 리더들만의 경우는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여러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인생은 매순간의 선택들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선택들이 각자의 인생을 채워 나간다. 자기 인생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불확실한 선택지 앞에서 도박을 할 수밖에 없다. 인생이 불가피하게 우리에게 크고 작은 도박들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불확실한 도박의 승률을 최대한 높이는 데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다. <야구 감독>은 그러한 면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자기 인생의 올바른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통찰을 안겨 주는 책이다.
에비사와 야스히사
이 책의 저자 에비사와 야스히사는 픽션과 논픽션을 혼합하여 각 분야에서 위업을 이룬 사람들의 삶을 소설화하여 일본 독서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작가이다. 1974년 <난(亂)>으로 신조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야구 감독>은 1979년에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책이다. 이 책은 그해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1988년에 <F1 지상의 꿈>으로 닛타 지로 문학상을 수상했고 1994년에 <귀향>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유능한 척후장교의 보고서처럼 군더더기 없는 그의 문장은 저널리스트의 냉철함과 소설가의 스토리텔링 두 가지를 다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야구 감독>을 통해 나도 에비사와 야스히사를 처음으로 접했고 그의 책까지 내게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그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확인하다가 그가 작년 8월에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1950년생이니 60년의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삶이었다. 짧았지만 그가 다룬 인물들만큼이나 뜨거운 삶을 살다간 그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카에타노
야구감독,
에비사와야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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