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용을 두고 90년대 한국만화의 성과라고 인정하는 데 주저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박흥용의 만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한국만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한국성을 두고 말하면, 그의 만화는 분명히 이두호가 보여주는 한국적인 소박함이나 뚝심, 방학기 만화의 한 컷, 한 컷을 장식하는 민화적 구도의 치밀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리얼리티 면에서도 박흥용은 오세영이나 이희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흥용은 자신이 넘어설 수 없는 선배들의 장점을 자신의 한계로 인식하자마자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만화사의 한 획이 된다. 달리 말해서 박흥용은 한국성이라는 것에 만화사의 한 획이 된다. 달리 말해서 박응용은 한국성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리얼리즘의 속박에서도 자유롭다. 게다가 그의 유모는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안하기까지 하다. 말하자면 그의 유머는 ‘엉까는’ 유머인데 맥락에 전혀 닿지 않으면서도 의미가 되씹힌다. 그는 우리의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유머의 골계미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그의 유머 속에는 항상 뼈가 들어 있다. 이 불안한 유머야말로 박흥용 만화의 반사회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으며 대(對)사회적 메시지를 무슨 작가주의의 훈장처럼 달고다니는 다른 만화가들과 구별짓게 한다.
  다시 말하면 박흥용의 대사회적 발언은 불온하다. 모순된 현실을 향해서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현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만화는 얼마간 아니키즘적인 측면이 있다. 『경복궁 학교』의 일탈된 인간들이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떠도는 인간들이나 모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서 있다. 그렇다고 오세영이나 이희재가 지닌 역사에 대한 반성도 박흥용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허영만의 주인공들처럼 운명을 받아들이며 비극을 향해 치닫지도 않는다. 박흥용은 항상 어떤 경계에 서 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렇듯 그 경계의 실체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가령 냇가에서 빨래하는 엄마가 아이를 보호하겠다고 끈으로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을 보고 주인공 견자가 내뱉는 다음과 같은 말은 바로 박흥용 자신의 중얼거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화자를 프레임에 소외시키는 박흥용 특유의 이러한 구도는 오히려 독자들을 극중의 인물들과 더 밀접하게 이어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독자들은 뒤통수에 눈이 달리 화자가 되어 남장한 오위부장의 딸을 바라본다.







  결국 박흥용은 자신이 그 한계를 맞이하고 있는 한 개아(個我)이면서 동시에 한계를 경계로 자신이 바로 그 경계를 무한히(무엇을?)확장하고자 하는 줄타기꾼임을 아프게 인식하고 있다. 박흥용의 자유는 그 경계에서 나온다. 그래서 박흥용의 한 컷, 한 컷은 ‘풍경’과 ‘풍경의 발견자’의 어찌할 수 없는 망설임을 표현하다. 줄이 상징하는 한계와 자유는 엄연히 섞일 수 없는 둘이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렇듯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몸인 그 무엇에 대한 박흥용의 탐구를 그리고 있다. 당쟁이 극심하던 선조 때를 배경으로 정여립, 정철 등의 혁신적 인사들이 펼치는 역사적 사건들과 어울려, 서자로 태어난 견자라는 인물의 정신적 성장을 그린 이 작품은 비록 확실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사만화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 단순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현실적 한계와 초월적 의지라는 상방된 두 논리를 결합해보려는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따라 역사적 배경은 한 인물의 정신적 성장과 연결된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어는 한낮의 정경을 그린 이 장면에는 빛이 가득하다. 마당에 빛이 가득함으로 해서 마당이 사라져버리고, 집과 인물들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은 마당이고 허공이다. 허공과 마당의 경계가 빛으로 인해 사라지고 하나로 화한다. 경계가 사라진 마음의 회화적 표현




  구도(求道)의 수단은 칼이다. 황정학이라는 절세의 고수로부터 칼 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인간의 본능과 인식의 자유를 배우는 과정은 나무하고 밥부터 하던 거기서 거기인 종래의 플롯들과 처음부터 구분된다(더군다나 황정학은 맹인이다. 황정학의 상대방의 칼날을 보지 않고 다른 무엇을 본다는 것은 종교적 형이상학으로서의 박흥용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완전성, 본질 같은 것). 나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면서 70년대 초에 내 마음을 휘어잡았던 만화 하나가 떠올랐다. 『불나비』, 굵은 펜터치로 우수에 젖은 검객의구도 과정을 그렸던 김민의 만화이다. 나는 이 만화를 보면서 어떤 교양서적도 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 육체와 육체의 향연 속에 펼쳐지는 진지한 철학적 성찰은 이후에 나온 그 어떤 만화도 뛰어넘지 못한 압권 그 자체였다. 굵고 강한 펜터치의 육체와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고요함을 잃지 않는 『불나비』의 모습, 그리고 허무, 일체의 배경을 과감히 지워나가면서 그려지던 폐허가 된 성의 풍경과 천하제일검의 허명을 찾아 도전해오는 무사들의 욕망, 나는 그런 것에 넋을 빼앗겼다.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김민의 『불나비』에 비해 그림의 묘사력에서는 월등히 현실적이지만 김민 만화가 가진 철학적 여백에는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바로 사실적 묘사력이 갖는 골계미는 앞서도 말했지만 딱 그 한계만큼 박흥용 만화의 독창성으로 전화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기행, 장님, 도적, 방짜쟁이, 환쟁이, 그리고 양반들로부터 역모의 수뇌까지 온갖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박흥용이 깔아놓은 역사적 배경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박흥용 만화에서 시대적 배경은 철저히 이야기의 합리성을 위해 존재한다. 박흥용 만화의 인물들이 시대 상황에 대해 갖는 울분은 그 다음의 자기 완성을 위한 동기로서만 중요하다. 동기가 해결되면 이야기의 전개는 바로 시대 상황과는 상관없는 절대성의 추구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니까 박흥용은 리얼리스트는 절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버릴때 박흥용 만화의 보편성은 비로소 획득된다. 시대적 특수성으로부터 시대와 상관없이 추구되는 보편성의 획득이야말로 박흥용 만화가 한국만화에 던진 이정표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그림은 역사물을 다루더라도 전혀 고풍스럽지 않다. 칼을 다루는 동작을 묘사할 때 박흥용은 조선의 ‘무예 도보통지’의 동작들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모던하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유를 분석할 수 있다. 첫째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있는 그림의 구도 때문이다. 박흥용의 시점은 박수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정면성과 평면성에서 일탈해 있고, 일상적인 눈높이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낯설다. 의외의 시점에서 인물과 배경을 묘사함으로 해서 그의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신선한 파격을 경함하게 한다. 둘째는 리듬이다. 박흥용의 선에는 원초적인 리듬이 살아 있다. 이 원초성이 박흥용의 에로티시즘에 건강성을 부여한다. 우리사와 나오키가 그 가는 선으로 그 가는 선으로 오히려 자극적이라면 박흥용은 다소 굵은 선의 강약을 조정하며 리드미컬하게 자극을 이끈다. 무엇보다도 그 수법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해도 배경을 움직여 긴장을 이끄는 솜씨는 탁월하다. 그리고 긴장을 풀어버리는 해이는 사람의 맥을 풀어 버릴 정도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박흥용의 이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더군다나 거기에는 아주 독한 향기가 있다. 때는 예술의 이름으로, 때로는 장인의 이름으로, 때로는 칼끝에서, 견자는 그 향기를 위해 죽음 앞에 서고, 자신을 따르는 여인을 서슴없이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잔인함이 있다.


박흥용의 리얼리티는 기묘한 부분에서 성취된다(왼쪽). 이러한 달이 과연 과장일까? 우리는 우리의 기억 어디에서, 언제인가 이런 달을 본 적이 있다. 오위부장 딸(오른쪽. 우리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없다)의 자진을 막는(보이지는 않지만 견자는 지금 칼날을 쥐고 있다. 칼날을 쥔 그의 피가 칼을 타고 오위부장 딸의 속살로 호르고 있다. 이 절묘한 에로티시즘.












"너는 연인을 죽였어. 눈을 뜨는 데 장애가 되면 그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죽일 만큼 넌 미친 거야."













   김민의 『불나비』가 천하제일검이라는 허명을 좇는 불나비들을 보면서 생의 허무를 깨닫는다면, 박흥용의 불나비들은 허명이 아니라 어떤 완성을 향해 치닫는다. 그리고 주인공인 견자조차 그 불나비들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후반부에서 한 ‘이름’에 대해 보이는 견자의 한계와 한계 속에서의 자유 혹은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다시 귀착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그래서 결론이 없다. 처음부터 내가 이 만화를 구도만화가 아닌 성장만화로 규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환쟁이가 자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끝을 끝내 보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장면은 이 만화의 처음과 끝을 말해준다. 우리 모두 다시는 되돌리지 못할 어떤 홀림에 의해 죽음의 길로 접어들고 만 것이다. 이 비극을 박흥용은 이렇게 뒤집는다.

 

이 비극의 생을 당신들은 무어라고 이름 부를 것인가?

출처: 함성호 만화이야기『만화당 인생』中 /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