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칼
박흥용 화백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두 개의 칼이 등장한다. 여기서 ‘칼’은 한계를 뒤집고 자유를 얻는 힘을 상징한다. 칼은 각각 안과 밖을 향한다. 칼끝이 ‘나’를 겨눌 것인가, ‘세상’을 겨눌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여기 그 기로에 선 인물, 견자가 있다.

 

 

견자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낳은 어미가 비천한 기생이라, 과거급제의 압박 없이 살아가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허용되는 범위래 봤자 기껏해야 동네를 개처럼 휘젓고 다니는 첩 자식으로 사는 정도랄까. 그러니 가슴에 쌓이고 쌓인 울분을 언제 한 번이라도 속 시원히 털어냈겠는가.
때마침 개자식 앞에 나타난 황정학. 칠흑 같은 세상에 진짜 눈을 뜬 소경이다. 침쟁이며 검객인 이 사내에게 반해 기꺼이 만석꾼 집을 벗어나는데 그 모양새가 참 아이러니하다. 이름 그대로 개망나니처럼 설쳐대던 녀석이 황정학이 내민 목줄을 매고 난생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줄이야...

 

지독한 열등은 지독한 열성을 만든다!
명문가의 적자로 태어나 소경이란 굴레에 갇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항아리 속에 갇혀 산 황정학. 첫 번째 항아리를 깨부수고 세상 밖으로 나와 그가 본 것은 ‘구르믈 버서난 달’이었다. 태생적인 한계와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되는 자기 한계를 가뿐히 넘어 선 큰 인물이다. 그런 스승을 따라나선 여정은 세상으로 향하는 자기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견자는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서얼 출신의 칼잡이에게서 지독한 열등감을 느낀다. 자신이 가장 닮고 싶은 스승마저 대단한 실력가라고 인정한 이몽학의 칼솜씨는 그 이름처럼 고고하게 날아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견자의 가슴 속으로 날아든다.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더욱 가르침에 목을 매는 견자. 지팡이가 된 스승 앞에서 기꺼이 장님이 되길 마다 않는다. 말 그대로 지독한 열등이 지독한 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진짜 자유는 자존심과 오기라는 항아리가 깨어질 때 얻는다!
무엇이 자기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황정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안의 나는 여러 가지 모습이다. 발가벗은 몸뚱이는 하나지만 그것을 가리고 덮은 껍데기는 여러 개인 것처럼 말이다. 겹겹이 껴입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하나 찾아내어 칼로 죽이란다. 한마디로 진정한 자아를 찾으란 얘기다.

“성을 함락시키는 이보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이가 진짜 칼잡이야. 이몽학의 칼이 무엇을, 누구를 겨누든 알 바 아니다. 넌 내 칼만 닮아. 이제부터 네 칼은 네 자신을 겨누는 거야. 내 칼로 나를 겨눈다!”

달은 구름과 똑같이 하늘에 떠 있어도 바람에 밀리지 않는다.
안으로는 지배계급이 세를 갈라 서로를 질시하고 밖으로는 흉한 왜인들이 쳐들어와 살인, 노략질을 일삼는 혼란 속에서 두 개의 칼이 일어선다. 이몽학이란 칼은 자기를 옭아맨 현실을 혁명을 통해 뒤엎으려 하고, 견자라는 칼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자신을 혁명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자유를 찾으려고 한다. 견자는 그 차이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이몽학이 구름을 좇는다면 나는 달을 좇는 거야.

 

박흥용 화백은 가혹한 시대에 태어나 오기와 한을 품고 자란 견자란 인물을 통해 전혀 다른 방식의 구원을 고민하게 만든다. 나를 변화시켜 구원받을 것인가? 세상을 변화시켜 구원받을 것인가?
태어나 제 스스로 머리를 굴리는 시점이 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기 한계에 부딪힌다. 수도 없이 계속해서. 그리고 그 한계를 깨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 늘 숙제처럼 주어진다. 크게 보면 황정학과 이몽학이 추구하는 방식 앞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어진다. 견자처럼.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두 개의 칼 중 어떤 것을 품고 살았을까? 어쩌면 그 어떤 칼을 세우기도 전에 먼저 포기하는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칼을 따르겠는가?

By 바다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