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Bill Bryson /Neither Nor There /1992

빌 브라이슨/ 권상미/ 21세기북스/ 2008.4.30.1쇄 / 2010.12.24. 13쇄/ 2011. 7.25. 인터파크/ ~9.04)

 

네 번째로 읽은 빌 브라이슨의 책이다. (발행 순서대로 치면 완전 거꾸로 읽은 셈이고)

어찌하다 보니 이 사람의 시니컬하면서도 웃음을 감출 수 없는 경험담과 그 문체에 중독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올여름 세 권의 여행 책을 내리 읽게 되었다.

똑 같은 여행지라도 이 사람이 쓰면 그곳을 둘러싼 아우라가 달라지는 듯하다. 수많은 여행기가 있지만 이렇게 유니크한 맛을 느끼게 해준 책은 없었던 것 같다.

 

1990년대 빌 브라이슨이 20여 년 전 친구(카츠)와 배낭여행 왔던 유럽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차원에서 혼자 여행하면서 적은 기록들이다. 다른 책에 다 있는 가는 법과 숙박법과 같은 정보도,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감탄도 없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가슴 뭉클한 사연도, 드라마틱한 사건에 휩싸이거나 아련한 로맨스도 하나 없다. 그런데도 혼자 주절주절 투덜투덜 떠들어대는 배불뚝이 미국 아저씨의 여행기는 마치 내가 그와 동행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 재미있고 현장감 있다.  

북유럽 함메르페스트에서 시작하여 파리, 브뤼셀, 벨기에,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코펜하겐 등을 거쳐 다시 스톡홀롬까지의 여정에 이어, 다시 로마, 나폴리, 소렌토와 카프리,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를 거쳐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과 유고슬라비아, 소피아, 이스탄불에서, 아시아를 코앞에 두고 여행은 끝이 난다.

 

융통성 없고 재미없는 사람들과 살인적인 물가에 혀를 내두르는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 거만하고 불친절한 파리 사람들, 히피와 창녀들이 득실대는 암스테르담, 의외로 괜찮은 함부르크, 완벽한 복지국가이지만 정나미 떨어지는 코펜하겐…. 정돈이란 모르는 듯 정신없는 로마, 쓰레기 더미로 지저분한 나폴리에 실망하지만 카프리에서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움 광장과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머물기엔 너무 근질근질한 스위스와 생각보다 재미없는 리히텐슈타인, 보수적인 오스트리아를 빠져나와 중세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유럽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소피아로 건너간다. 이 책에 의하면 세상에서 제일 소란하고 지저분하고 번잡스런 곳은 이스탄불이고, 세상에서 제일 조명이 어두운, 살 물품도 팔 물건도 없는 도시는 소피아이다.

책을 다 읽고 정말 그런가 싶어 소피아를 검색해봤다. 20여 년이 지났으니 물론 지금은 이 책에 쓰여 있는 만큼 열악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책이 출간된 것이 지금보다 20여 전의 일이니 지금의 여행기로 읽기엔 무리가 있지만, 불과 20여 년 전의 세계(유럽)라고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도 한다.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기차를 타고 호텔에 머물고, 맥주와 음식이 있는’ 혼자만의 목적 없는 여행의 전형을 보여준다.

 

빌 브라이슨도 얘기했지만, 여행이란 얼마나 우습고 이상한 행위인가.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383면, 이스탄불) 참으로 이상한 행위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런 여행을 꿈꾼다.

우리는 애초에 모두 알고 있었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는 길’(386면, 이스탄불)이란 것을. 그러나 지금의 가슴의 고동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결과가 아니라 지금 당장, 가방을 메고 기차를 잡아타는 것, 그것밖에 없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

 

-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영국에는 도저히 들어오지 않을 영화의 포스터도 구경하고 움라우트(독일어의 특수 기호)와 세디유(대개 c 밑에 붙는 s 모양의 기호)가 잔/득 붙은 각종 상품과 상점 안내문, 그리고 주차금지 표지판 비슷하게 생긴 문자(Ø)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그 나라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전혀 히트할 가능성이 없는 대중가요도 돋고, 나와는 평생 연이 닿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전화박스 사용법부터 저 식품의 정체가 무엇인지까지 도무지 친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국적인 곳에 가고 싶었다. (57면, 오슬로)

 

- 세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영화에서 본 배경 장면으로 형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결백하다>나 <네 멋대로 해라>, <사라의 샘>, 그리고 심지어 <형사 클루조>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까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런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아이오와 촌구석 피오리아쯤에 처박혀 살면서 이 정도면 최고의 삶이라고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10면, 로마)

 

-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매일 동이 트면 일어나서 아직 공기가 신선하고 아무도 쓰지 않은 새것 같은 느낌인 그 완벽한 시간에 도시가 깨어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212면, 로마)

 

- 나는 친절하고 호화로우면서 손님도 거의 없는, 뒷골목에 자리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다 보니, 이런 안락함과 완벽함에 대해 내가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인들 틈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괴이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유를 넣은 차 한 잔과 초콜릿 다이제스티브 비스킷 이상 가는 즐거움은 불경스러우리만치 과한 호사라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매일 저녁 차가운 호프 한 잔이 고작이며, 산책이라고 나가봐야 햇살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야생 습지가 번부고,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윔피에서 햄버거로 때우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난 이토록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데 대해 적어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점을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나아졌다. (241면, 나폴리, 소렌토 그리고 카프리)

 

-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 아닌가. (383면, 이스탄불)

 

-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까. (386면, 이스탄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