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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공항에서 일주일을>A week at the Airport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청미래/ 2009.12.28.1쇄/ 2010.1.12.인터파크~1.16

한 후배는 기분이 안 좋거나 우울할 때면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 비행기가 뜨고 지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다 돌아온다고 했다. 한 친구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가 제일 아쉽다고, 비행기 타고 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물론 나 같은 심각한 비행공포증 환자에겐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역이라든지 공항 같은 단어를 떠올릴 때면 나도 모르게 여기가 아닌 저기로 함부로 먼저 가 있는, 어떤 시적 그리움으로 부풀려진 순간의 마음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을 공통으로 가진 인간의 어떤 성질 중 하나가 만들어 내는 향수감일 것이다.

‘공항’이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는 사람들 중에 (아마)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알랭 드 보통일 것이다. “집에서 우울할 때면 기차나 공항버스를 타고 히스로 공항으로 가, 2번 터미널에 있는 전망대나 북쪽 활주로 변에 있는 르네상스 호텔의 꼭대기 층에서 비행기가 끊임없이 뜨고 내리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라는 그의 글에서처럼(<여행의 기술>, 54면) 알랭 드 보통은 공항뿐 아니라 떠남(여행)이란 행위를 낭만적이고도 합리적인 문장으로서 정당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마도 히드로 공항이 새 터미널을 개장하면서 여러 개의 마케팅 계획 중 하나로 채택했을 것이 분명한, 공항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도 크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알랭 드 보통을 꼽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에게 일주일 ‘상주작가’를 제의했을 것이다.

전대미문한 ‘공항 상주작가’(writer-in-residence at Britain’s largest airport)라는 타이틀로 일주일 동안 공항 한 가운데 놓인 책상에 앉아 일반인이 궁금했던 공항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의뢰한 히드로 공항 소유주인 BAA에서는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나쁜 점을 써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드 보통은 지식인의 언어가 아닌 저널리즘식의 시선으로 책을 쓰겠다고 했고, 책에서는 떠남과 돌아옴의 낭만성뿐 아니라 공항에서 일하는 청소부와 기장에서부터, 기내식 만드는 과정, 검문 행위, 이별하는 연인들과 재회하는 가족, 팻말 들고 기다리는 비즈니스 맨 등 공항에서 이뤄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썼다. BAA측에서는 드 보통의 이 책을 1만부 사서 탑승객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아마도 앞으로 공항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곳(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에서도 ‘상주작가’제를 도입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 책의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 또한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런 곳에서 ‘여전히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사실에 근거한 리포트의 본연에 충실하느라 팩트를 담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드 보통 특유의 사유와 재치가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아니 내용과 사실에 비해 문장 전체가 너무 많은 수식과 비유가 들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많았다. 솔직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회사 CEO와의 만남에서 딱딱한 내용의 인터뷰가 아니라 "… 월시 씨도 내 주장의 논리를 금방 이해했다. 사실 그 자신도 조종사 출신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비행기가, 그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가 하늘로 솟구치기 위해서 자신의 크기와 대기의 저항에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또 게이트에 있는 747기는 수하물 카트와 정비공들이 난장이처럼 작아 보일 정도로 큰데, 그런 괴물 같은 기계가 몇 미터라도 움직인다는 것, 하물며 히말라야 산맥을 가로지른다는 것에 놀랐다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와 같은 부분들이다. 또 터미널 관제실 옆에는 지구 전역에 약 180대의 비행기가 떠 있는 세계지도가 있고, 이들이 약 10만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이라든지, 비행기에게 900시간의 비행시간이 허용된다든지와 같은 내용들이 새로운 재미를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 처음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던, 나, 혼자라는 사실에 바짝 긴장한 한 방랑객이 떠올랐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갈 때만 해도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와 아기자기 어여쁜 런던 시내가 내려다보였는데 어느 순간 어둠이 내려와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더군다나 새로 산 여행가방은 바퀴가 하나 떨어져 나가 있었고, 검색대의 거만한 얼굴을 한 여자의 지나치게 깐깐한 체크는 처음부터 사람을 기죽이기에 충분했다. 히드로와 나와의 첫 만남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이 환하게 켜진 초저녁의 히드로 공항이 담긴 책표지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느새 마음은 다시 그곳에 가 있는 듯 히드로가 그립기도 하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책이기도 하지만 리처드 베이커라는 사진작가의 사진집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공항 사진을 담고 있다. 표지 그림만 봐도 가슴 설레는 사람 분명, 많을 것이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책 내용 중 유독 삼성, 서울, 대한항공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보인다.

*1997년 내가 처음으로 알랭 드 보통의 책(<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을 읽었을 때(이 책이 나중에 다른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제목은 잘 기억 안남), 책날개에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사진은 머리숱이 많은 꽃미남 스타일이었다. 스물 네 살 청년이 쓴 소설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독특하고 이지적인 소설로 기억하는데, 이 사진 덕분에 나는 항상 알랭 드 보통을 꽃미남으로 기억해 왔다. 얼마 후 그의 유명해진 책들 속에 떡하니 박힌 민머리 아저씨 사진은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의 그 꽃미남과 연결 짓기가 어려웠다. 친구들에게 한때 알랭 드 보통이 잘생긴 미소년 스타일이었다고 얘기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ㅠ

* 구글에서 알랭 드 보통의 동영상 인터뷰를 봤다. 상당히 듣기 좋은 브리티시 액센트의 나이스한 목소리.^^ 알랭 드 보통은 세련되고 이지적인, 지금의 시대가 원하는 바로 그런 지식인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리뷰 카테고리를 어디에 넣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여행’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