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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끝, 마니>(펠로폰네소스 남부 여행기) / 패트릭 리 퍼머 Patrick Leigh Fermor /강경이/ 봄날의책/ 515면/ 2014.7.21. 초판1쇄/ 2015.2.3. 인터파크/ 9.26~10.5

어렸을 때부터 나의 취미는 세계지도를 보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지리 시간이 제일 재밌었고, 나라와 지명 외우기를 하면서 세상을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세계여행을 하며 놀았었다.

<그리스의 끝, 마니>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그리스 지도를 다시 찾아봤는지 모른다. 새삼스러웠다. 그토록 많은 나라들이 내 손가락 끝에 머물렀지만, 왜 이 나라, 이 지역에는 단 한 번도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내게 그리스는, 수없이 들어왔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신화의 나라이자, 최근엔 국가재정 위기와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에 대한 이야기로 좀 전까지 국제뉴스의 상당부분을 차지한, 그런 나라였다. 물론 그 사이에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나 <맘마미아> 혹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작품들이 있기도 하고, 하루키의 <먼 북소리>에 등장하는 무수한 섬들(스펫케스 섬, 미코노스 섬, 크레타 섬, 레스보스 섬..)도 있으며, 야니, 반젤리스, <페드라>의 메르쿠리 문화부장관, 그리스 내전, 수많은 여자들을 울린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 아리아나 허핑턴, 심지어 그릭 요거트가 이미지로 떠오르는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 <비포 미드나잇>을 보면서 ‘여름휴가를 그리스 정도 갈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리스의 끝, 마니>는 그동안 내가 미처 몰랐던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남부, 척박한 산악지대인 서남부 반도와 섬에 대한 이야기다. 지중해의 한가운데이지만, 반도의 산맥으로 가로막혀 물도 나무도 변변히 나기 힘든데다 바람과 태양만이 강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이 지역은 예로부터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변방으로 존재했다.

저자인 패트릭 리 퍼머(Patrick Leigh Fermor, 1915~2011)는 영국의 여행작가로, ‘20세기 최고의 여행작가 중 한 명’이라 일컬어진 사람이라고 한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터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이르는 도보여행을 기록한 <선물 받은 시간>과 <숲과 강 사이로>는 큰 호응을 얻은 바 있고, 또 2차대전 중 큰 공적을 세워 그의 삶이 영화화되기도 한 인물인데, 말년에는 그리스 마니 지역 올리브숲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주목한 것은 신화를 벗어난 역사 뒤에 숨은 그리스, ‘통신이 조악하고 외진 곳에 사는 탓에 환경과 역사의 오랜 관계가 그다지 훼손되지 않은 사람들’과 현대화에 파괴되지 않아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그런 지역이었다. 특히 ‘마니’라 불리는 지역은 그리스 서편 삼지창처럼 생긴 펠로폰네소스의 남부 세 반도 중 맨 아래(남쪽)이자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이오니아해와 크레타해를 가운데서 만나는 지역이다. 고대인들이 하데스의 입구라 여겼던 타이나로스 곶(마파탄곶)이 있는 곳이자,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무서운 뱃사공 카론의 땅이기도 하다.

마니는 먼 옛날 스파르타왕조가 도망 와 이룬 후예들의 씨족 지역이라고도 하는데, 지형적 험난함은 “어쩌면 이곳 사람들의 경계하는 듯한 음울한 얼굴도 커다란 모자 밑의 거무스름한 피부처럼 수세기에 걸친 거친 삶이 신체적 흔적으로 남아 대대로 내려온 탓”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외모에다, 지역적 폐쇄성을 띠어 이 지역의 이모저모는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인이든 마니라는 이름을 들으면 즉시 떠올리는 네 가지가 있는데, 씨족간의 혈수, 만가輓歌,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마니의 지도자 페트로베이 마브로미칼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니가 크레타 섬의 스파키아 산악지대와 에피루스의 술리와 더불어 (잠시 동안이지만) 터키인들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고 위태로운 독립을 유지했던 유일한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부족간의 혈수를 설명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 지역의 ‘지역감정’이 얼마나 극심한지 알 수 있었다. 산 하나 너머의 사람들도 ‘무시무시한 아랍인’이라든지 ‘못 믿을 사람들’ 혹은 ‘야만인, 식인종이라 만나면 안된다’ 등의 무지에서 오는 비방과 혐오와 경멸 등이 난무했다. 반복되는 씨족간의, 민족간의, 지역간의 논쟁들을 보니 오늘날 그리스 내전을 비롯해 발칸반도 대부분의 나라들이 왜 그토록 끈질기게 전쟁을 치러야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 듯했다. 크게 보면 세계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비잔틴-발칸 지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한데, 과연 ‘씨족’, ‘족속’,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마니 지역에 대한 여행기라고 하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마니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지만 그 줄기는 그리스에서 유럽의 역사로, 민속학에서 인류학으로, 언어학에서 신화학, 종교학으로, 또 미술, 음악, 문학 등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특히나 이쪽 언어와 지역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겐 ‘~오스/우스/아스/로스/노스/나스/리스/네스/코스/모스’로 끝나는 수많은 이름들과 전설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동안 헤매다 나온 기분이다. 솔직히 이 책을 쓴 사람도 대단하고, 번역한 사람도 대단하며... 읽는 사람도(^^) 대단하다는 것이 다 읽고 난 뒤의 소감이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가 진짜 조르바와 함께 마니 지역에 한동안 살았으며, <파타고니아>의 여행작가 브루스 채트윈도 마니를 즐겨 찾아 유골을 마니에 뿌려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유골을 뿌린 사람이 이 책의 저자 패트릭 리 퍼머라고.. 그만큼 진짜 여행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혹적인 곳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네이버와 구글로 그리스 지도를 찾아보고 그 지역의 이야기와 사진을 찾아 살펴보았다. 마니지역은 지금도 여전히 메마르고 척박해 보이는 곳이긴 하지만, 아테네와 산토리니만 알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그리스에 대한 흥미를 일깨워주기 충분한 매력적인 데스티네이션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어내는 시간은 마니나 그리스를 조금이라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지만, 책의 내용에 따라 궁금해진 비잔틴 문화,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크레타 등으로 내 관심을 옮겨가는 또 하나의 여정이었 것도 사실이다.

아, 또 하나의 팁은, 영화 <비포 미드나잇>의 배경은 남부 펠로폰네소스로, 이선 호크와 줄리 델피가 밤에 항구끝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는 해지는 장면이 바로 마니의 항구라는 것이다. 어찌 한번 가보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일수록, 더 이상 잃을 재산이 없을수록, 물질적인 위로와 위안의 가능성이 적을수록,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더욱 슬프고 치유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비통한 심정이 더 풍요롭게 표현된다. 이런 지역에서는 목숨 줄이 약하다. 그날 그날 살아간다는 게 기적이며, 언제든 끊어질지 모를 위태로움 앞에서 삶은 더욱 소중해진다.(5장, 애도-106면)

>> 마니 사람들의 푹 꺼진 안구와 뺨, 각이 진 턱선에서 해골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생기 넘치는 대화의 환한 빛이 어둡고 체념적인 사색의 빛으로 사그라질 때면 힘든 노동과 가난, 열병, 걱정으로 삶을 소진한 노인들에게는 죽음이 애처로울 만큼 가까이 어른거린다.(5장, 애도-107면)

>> 고대 종교의 광란적이고 히스테리적인 제의에는 깊은 지혜가 있다. 슬픔의 수문을 활짝 여는 이 관습에는 긍정적인 게 많다. 감히 말하건대 서양의 점잖고 소박한 장례식, 소리를 낮춘 목소리와 자기절제, 용감한 미수, 침착함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질식시키거나, 땅속으로 몰아넣어 그곳에서 음험하고 위험하게 뿌리를 뻗으며 평생 곪아터지게 놔둔다. (5장, 애도-109면)

>> 아주 무신경한 나그네가 아닌 이상 누구든 그들의 표정-가끔은 경솔하고 투박하게 들리는 몇몇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에 담긴 열의와 배려를 보면 곧 이 모든 질문이 진심으로 열렬한 관심에서, 가능한 하 즉시 공통점을 찾아서 위험하고 쓸쓸한 마니의 환경으로부터 나그네를 보호해주려는 소망에서 나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무관심은 짐승같은 것이며 인간적 감정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그네가 앉은 의자 둘레에 공작의 날개처럼 널찍한 타원형으로 몰려들어 갑자기 등장한 이 수수께끼를 풀겠다는 의지와 놀라움에 휘둥그레진 선한 눈으로 나그네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어른들에게 쫓겨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도 똑같은 관심과 소망을 읽을 수 있다. (14장, 라이아에서의 담소: 키프로스와 글래드스톤 부인, 336면)

>> 그러니 바람을 일컫는 그리스어 ‘아네모스’에서 영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가 나온 것도, 그리스어 ‘프네누마’와 라틴어 ‘스피리투스’가 영혼과 숨, 바람을 모두 뜻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그리스인들이 전장에서 지르던 함성-잉글랜드의 ‘세인트 조지’, 프랑스의 ‘몽 주아 생 드니!’, 에스파냐의 ‘산티아고!’에 해당되는- 이 바람과 공기 두 가지 모두를 뜻하는 단어 ‘아이라!’라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17장, 라코니아 만 상류로; 동물과 바람, 4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