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쪽배의 노래> / 김채원/ 문학동네/ 337면/ 2015.1.26(초판발행)/ 2015.7.16. 인터파크/ 2015.8.7~28

책상 위에 놓은 <초록빛 모자> 앞장에는 85.8.1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때 나는 책에 산 날짜와 이름을 적어놓던, 아직 어린 대학교 이학년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그녀, 김채원은 그리고 그녀의 소설속 여자들은 곧 ‘나’였다. 내가 소설을 썼다면 아마도 그녀와 같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끝내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녀, 김채원이 이미 ‘나’를 쓰고 있었으므로.

- 소설 <쪽배의 노래> 발문 ‘그 여자, 시시(時時) 곳곳에 있는 ‘나’들’, 문혜원(문학평론가)  -

발문을 읽고 깜짝 놀랐다. 예전에 내가 써놓고 잊어버렸던 어떤 글귀를 문득 찾아 읽은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나와 같은 마음의 사람도 있구나....

나 또한 김채원을 알게 된 것이 그가 이상문학상을 타기 한해 전에 읽은 <초록빛 모자>가 시작이었고,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나 가족사, 마음의 흐름과 묘사, 관심, 생각, 시선 등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이후 이십여 년 동안 그가 책을 펴낼 때마다 꼬박꼬박 사서 읽으면서 매번 “어마.. 참 나같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와 나는 어머니와 딸같은 나이차이가 나는데, 어쩌자고 나는 이런 동류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아마도 김채원의 시대를 타지 않는(늙지 않는) 세련된 문체와 문화 전반에 걸친 관심사와 그를 둘러싼 아릿한 정서와 향수감 덕분이었겠지만,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혹은 세상에 굳건히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듯 머뭇대는 사람 특유의 어떤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그리고 나랑 닮은 닭다리 같은 손)

예를 들면 이런 부분에서 나는 밑줄을 쳐왔고, 여기서 또 하나의 나를 (안타깝게도) 확인했다.

“자신을 다 바쳐도 삶이 정돈되지 않을 듯한 절망감”(봄의 환)

“해저(海底) 저 밑에는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하던데 타인이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가을의 환)

“그가 가는 것을 이층에서 내다볼 때 현재임에도 이미 먼 옛날인 듯한 향수감.”(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

“나는 언제나 그 순간에 살지 않는 것 같다. 과거나 미래에 산다. 그러기에 지금을 샅샅이 느끼지 못하고 만다. 그에게서 사랑받는 이런 행복을 내일 때문에 오늘 누리지 못한다.”(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

“다시 보거나 음미할 틈도 없이 인생은 원래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게 되어 있는 건지 몰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뭔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커다란 덩어리들을 언제나 밀쳐놓은 채 생활 속에 서 있곤 했다.”(누가 빨강 파랑 노랑을 두려워하는가)

...

이렇듯 김채원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은 어찌 보면 어리숙하고 주저주저하고 “할 때마다 망설여지는 것투성이”인 사람들이다. 대신 속으로 품거나 속삭이거나 되새기거나 후회하곤 하는 내성적인 스타일인데, 그야말로 안으로, 속으로, intro의 또 다른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가끔씩은 엉뚱하다싶을 정도로 대범하거나 의연하거나 쿨한데 그것이 종잡을 수 없거나 이해불가의 엉뚱함이 아니라 안에서 모였던 열기가 자연스럽고 시원하게 밖으로 나아가는, 인생이란 거대한 바다를 대하는 경건함 같은 그런 느낌이다.

“무엇인가 아주 다른 어떤 것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일의 필름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기만 하면.”(봄의 환) 

“나보다 더 멀리, 나보다 더 창조적으로”(겨울의 환)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 서 있다.”(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

“두려움이 있다면 왜 두려운가 하고 그것을 끝까지 잘 들여다보고 녹여내야만 해. 두려움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녹여내야지...”(서산 너머에는)

김채원이 십일년 만에 내놓은 이 소설집엔 지난 2002년부터 쓴 것부터 2014년에 쓴 것까지 모두 7편의 소설(서산 너머에는, 등뒤의 세상, 조금 더 가까이, 물의희롱-무와의 입맞춤, 소묘 두 점, 누가 빨강 파랑 노랑을 두려워하는가, 쪽배의 노래)과 지난 1984년에 쓴 ‘가득찬 조용함’의 일부를 개작한 <거울 속의 샘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그의 초상이었다는 언니 김지원 작가를 먼저 보냈는데, 언니와의 대화가 연상되는 <서산 너머에는>을 비롯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그린 연애이야기 <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 색다른 내용과 묘한 충격을 주는 <소묘 두 점>, 전쟁터에서도 살아왔지만 어이없이 죽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가족사 <쪽배의 노래> 등이 실려 있다. 그의 소설들에서 반복되는 몇 가지 모티프와 주제들은 어쩌면 그의 개인사를 바탕한 것이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문학을 이렇게 따라가며 지켜보는 것이 독자로서는 관찰자적인 재미를, 인생 후배로서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해주는 동력을 얻게 해주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좀더 오래 이 작가를 따라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건필하세요! 

* 십여년 전에 만들었다는 작가의 단편영화 <거울 속의 샘물>도 책에 소개되는데, 유튜브에서 제목을 치면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usq1MAtilGg   

 

우리집 책장의 김채원 코너^^... 그 옆으로는 배수아가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