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 배수아,  Werner Fritsch / 가세/ 249면/ 2014.11.29 초판/ 2014. 12.22. 교보~ 12.25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기다릴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늑장부리기, 잠자기. 인파에, 거리에 휩쓸리게끔 너 자신을 방치하기. 도랑을, 철책을, 배를 따라 물가를 좇기. 강둑을 따라 걷기, 벽에 찰싹 붙어 지나가기. 네 시간을 허비하기, 온갖 계획으로부터, 모든 성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조재룡 옮김)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었다. 다른 그 무엇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오직 나 혼자만이 감내해야할 고통과 함께, 간신히 이 책에 기대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결국 나도 잠자는 남자와 함께 일주일을 보내게 된 것이다. 캘리포니아가 아닌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는 애인을 기다리며....

이 책은 소설가 배수아와 독일의 비디오 아티스트 베르너 프리치가 일주일 동안 캘리포니아로 촬영여행을 떠난 이야기를 쓴 일종의 여행 에세이이자, 어쩌면 아닐 수도 있는 책이다.

캘리포니아라면, 김영주가 쓴 여행기 <캘리포니아>도 떠오르고, 정영문의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도 오버랩되는데, 배수아의 캘리포니아는 배수아만의 시선으로 그려낸 또 다른 세계 같다. 보기 위한, 즐기기 위한, 감탄하기 위한, 혹은 나를 찾기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소재로서의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기다리기, 방치하기, 허비하기, 그리고 벗어나기’로서의 여행지의 대상인 캘리포니아다.(아마도 캘리포니아가 이런 식의 대상이 된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이 책의 두 주인공은 할리우드 드림 호텔, 아마고사 오페라 하우스 호텔과 같은 천연기념물초처럼 오래되고 낡은 호텔을 찾고,  데쓰벨리와 모하비 사막 등지에서 촬영을 한다. 식욕이나 식탐을 벗어난 담백한 욕구를 가진 이들은 커피와 빵, 사과 한쪽, 맥주만으로도 드넓은 캘리포니아를 종단한다.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늘 그렇듯이 느리고, 햇빛으로 환하고, 은밀하고, 수줍고, 낯설고, 그리고 막연한 들뜸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좋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한다. - 여행지의 아침식사, 91면 -”

여행기도 종류로 분류한다면, 상당히 독특한 느낌의 책이고, 역시 배수아의 책이구나, 하는 느낌에 안심이 되는, 변방의 정서로 가득한... 아득한 책이다.

* 책에서 계속 잠자는 남자로 불리는 베르너 프리치는 (사실 나의 링크드인 친구이기도 하다) 자신의 잠자는 모습을 촬영되기를 바라고 찍어주길 요청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 잠자는 남자의 여행법은 이렇다. 드림 호텔에 도착한 첫날, 늘 그렇듯이 잠자는 남자는 제일 먼저 여행 가방에서 책들을 꺼낸다. 그리고 집에서의 습관 그대로 책들을 각각의 장소에 배치한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는 잠들기 전에 읽을 책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직후 아침 햇살 속에서 가장 먼저 펼쳐 들 하루의 첫 책들을 골라 놓는다. 욕조 곁에도 한두 권의 책이 있다. 목욕하면서 읽을 책들이다. 그가 욕조에 들어간다는 것은 목욕을 하겠다는 이유보다는 따뜻한 물속에서 책을 읽겠다는 이유가 더 강하다. 그가 주로 일하는 소파 테이블에도 당연히 책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다. 어느새 호텔 객실의 모든 공간에는 책들이 있다,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카운터에도 책들을 세워둔다. 로비에서 가져온 지역 신문도 있다. 책들 곁에는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놓인다. 심지어 잠자는 남자는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를 이불 속으로 데리고 오듯이 책들을 이불 속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 잠자는 남자의 여행법, 67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