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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슬픔...

올해 첫 소설로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을 읽었다. 책을 보니 지난해 8월 31일에 산 책이다. 몇 달을 읽을거리 리스트로 순번을 기다리다 12월부터 읽기 시작해 올초 다 읽었다.

읽은 지 한 달이 지나 다시 책을 보니 막막하다. 읽을 때, 좋은 문장을 발견했을 때, 뭔가 뭉클 가슴속에 밀려왔을 때, 그때의 심정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만, 분명 다시 그들을 불러내어 그때와 똑같이 맛보기란 쉽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하는 사실은, 배수아는 참 좋은 소설가란 점이다. 그의 책을 읽을수록 이 확신에 흔들림이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난해하거나 지루하거나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항간의 불만 혹은 혹평에 시달릴 만도 한데, 분명하게 자기 노선을 따라 의연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기조차 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배수아 소설이 좋다. 이런 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문장과 정신의 힘을 믿고, 갈 데까지 가보는 작가를 근년에 본 적이 없다. (소설 자체의 완성도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8편의 단편들은 한 편의 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그의 여느 장편소설 또한 그러한 것처럼 비슷한 정서(톤)의 비슷한 주인공들이 나온다. 김종삼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했듯이, 배수아의 소설을 읽으면 ‘내용 없는 슬픔’에 대한 정조가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부드러운 스펀지가 손아귀 안에서 힘껏 비틀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내용이 하나도 없는 슬픔이었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257면)

첫 소설 ‘양의 첫눈’은 북유럽 어디쯤(아마도 독일 북구)의 정서가 안개처럼 묻어 있는 소설이다. 특히 주인공 양이 지하철에서 어떤 소년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는 상황은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 죽다’를 읽는 듯 숨 막힌다.

혹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통해 생의 궁극적인 물음을 담은 소설 ‘북역’을 읽을 때는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묘사해 놓은 20세기 중반 인도양의 붉은 노을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한편 한편이 던져주는 감정의 파장은 다르다.

인상적이었던 문구들을 모아본다.

.. 사람의 인생은 그렇듯 먼 곳에 있는 한 젊은 여인의 집을 찾아가는 것. 그래서 오직 그 문을 두드리는 것. (북역, 89면)

... ‘그렇지만, 사실 가장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과정과 노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이미 모두 다 알고 있는 그 사실 중에 그냥 있는 건지도 모르지. 달이나 별, 아니면 우리가 매일 부르고 있는 노래처럼 이미 모두 다 당연히 알고 있는 그런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에서, 다만 손에 움켜쥐고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않았을 뿐이라면. 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보지 않았고, 그 곁을 그냥 지나쳐서 깊은 정글 속으로 계속 들어간 거라면. 마치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인생을 들여 음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래서 수많은 유일한 것들이, 달과 별, 꽃과 앵무새, 그리고 그 노래까지도 우리 곁을 이미 스쳐지나가 버렸다면, 만일 그렇다면, 나는 자신을 포함해서 참으로 불행한 무수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 셈이다.’(북역, 107면)

.. 화분의 난초 꽃잎과 빈 새장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빨래가 널린 발코니,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놋쇠 촛대와 열린 창으로 밀려들어오는 낯선 언어의 지저귐, 골목길을 메운 관광객들과 오토바이의 소음이 그곳의 풍경을 이루었다. 그 풍경이 암시하는 것은 기묘한 기다림이었다. 약속이나 형체가 없는, 길고 어스름한 낮잠 속의 기다림. (올빼미, 63면)

.. 예외적인 감정의 충동과 슬픔을 상기시키는 날씨였다. (올빼미, 70-71면)

... 어린 올빼미는 어디서 저런 육체의 정적을 배웠는가. (올빼미, 71면)

.. 네 말처럼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우리에게 종교이자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내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가 그것을 가장 원했을 것임도 잘 알고 있지만, 글을 나에게 이제 더 이상 지고한 기쁨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오직 무력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고 말 것이다. 한 사람이 가고, 그런데 그 사람을 하데스로부터 결코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면, 한 인간의 모든 정신적 행위는 결국 생을 향한 허망한 교태 이상의 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올빼미의 없음, 14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