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그렇게 우리 주변, 일상의 곳곳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다가,

발길에 채고, 발목을 적시고, 마음을 두드린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에는 앞마당이 있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목련 나무를 참 못마땅하게 여겼다. 바닥에 닿아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는 잎의 신세가 애처로웠던 건지, 아니면 마당을 더럽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잎의 기능 상실에 불쾌감을 가졌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때 내가 그 나무를 미워했다는 사실이다. 나무의 소중함은 안중에도 없었고, 나무가 본연의 이야기를 갖고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으며, 그 나무를 마당에 세워둔 우리 집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시간이 흐르면 미워하는 대상마저도 추억으로 미화돼, 까닭 모를 그리움을 한가득 싣고 내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내내, 끝끝내 내 기억의 끈을 놓지 않던 그 목련 나무에 대해 식구들끼리 대화를 나누기까지!

이 책은 세계일보에 연재되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란 제목의 칼럼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부부 건축가는 이야기 밑천을 구하기 위해 곳곳을 누비고 다녔는데, 발을 디딘 곳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우리네 말로 또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며 건축도 그렇게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 이 책은 각각의 챕터에 하나의 키워드를 설정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건축과 이야기 모두 '짓다(build)'의 대상이 된다는 점과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인문학과의 조합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동했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계기는 명품과 모바일, 집단지능, 그리고 환타지와 같은 건축과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키워드를 선정한 것을 알고 난 후였는데, 이야기의 조합이란 마치 씨실과 날실을 엮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풍부하기까지하다. 참고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님의 말을 빌자면, "이 책은 건축을 이야기로 푼 책이고, 동시에 이야기로 세우는 건축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건축을 인문학적 주제로 녹여냈는데, 생각에 매임이 없고, 그 생각을 풀어내는 문장에 눌린 데가 없다." 건축과 인문학의 만남, 게다가 잊고 있던 예전의 어느 한순간 또는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이 한 권의 책은 마치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듯한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긴다.

삽화와 사진은 또 어떤가? 그것들은 내게 어서 필운동 오 대감 댁이며, 김수근의 공간 사옥이며, 논산 윤증 고택이며, 황룡 사지와 송시열의 남간정사를 넘어 오스트리아의 쿤스트하우스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폴링 워터에 이르기까지 한 번 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