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면 정말로 어른이 되어야 했다." - 본문 p.46

 

"저 꼭대기 있는 세력은 대체 어떤 인간들이기에 그 수많은 병사의 희생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는걸까?" - 본문 p.419

 

"나는 마침내 다리 끝에 이르렀고 지루해하면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미군 보초 옆을 지났다" - 본문 p.518

 

"1945년 6월 18일 나는 드디어 석방 증명서를 쥐고 민헨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시내 중심지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 본문 p.529

 

2차대전사와 관련된 서적들은 이미 넘치듯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장군들의 전쟁"이라 할 수 있죠. 장군출신이나 전사 전문가들은 전쟁에 대해 거시적인 관점에서 작전술과 지휘, 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기술할 뿐 전쟁을 실제로 수행하는 이들은 무명의 병사들이라는 사실은 망각합니다. 간혹 중간중간에 전사자 시체에서 발견된 남긴 편지나 수기를 참고자료로서 삽입할 뿐이죠.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오브브라더스"같은 할리우드 전쟁영화에서 "독일군 병사"란 등장한지 1~2초만에 주인공들이 쏜 총에 맞아 비명도 못 지르고 수수다발처럼 죽어나가는 존재들일 뿐이죠. 1993년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 "스탈린그라드"는 드물게 독일군 병사들의 시각에서 전쟁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폭풍속의 씨앗"의 저자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전 SS중사는 바로 이런 이름없는 병사A가 10대후반에서 20대초반까지, 즉 전쟁의 처음부터 베를린이 함락되는 마지막까지 7년간의 전쟁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수기형태로 쓴 책입니다.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조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오스트마르크"라는 독일식 이름의 일개 지방행정구역으로 전락했던 1938년, 15살의 나이로 독일군에 자원하였습니다. 그가 국방군에 들어가지 않고 처음부터 무장친위대에 자원한 것인지 훈련소에 입소한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무장친위대로 분류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가 입대와 함께 처음 배속된 곳이 바로 정치범들을 수용하고 있는 강제수용소의 경비대였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는 훈련을 마쳤고 1939년 10월에 창설된 제3SS사단 "토텐코프"에 이등병으로 배속됩니다. 순진한 소년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시작이었죠.

 

이 토텐코프사단은 나치 광신자로 뭉친 SS사단들중에서도 가장 악명높고 잔혹하기로 이름난 부대입니다. 엘리트부대이면서도 주로 점령지에서 유태인 색출과 인종 청소같은 전쟁범죄에 가담하였고 이 책의 저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40년 서부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노포크연대의 영국군 병사 100여명을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살했습니다. 당시 책임자였던 프리츠 크뇌글라인중위는 전쟁기간중 대령까지 승진했으나 패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죠.

 

 

특유의 해골마크로 유명한 토텐코프사단의 사단마크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저자는 강제수용소 경비병에서 시작해 통신병을 거쳐 운전병 보직을 받았고 폴란드 전역에서부터 서부전역, 바바롯사작전, 치타텔작전을 거쳐 이탈리아 항복후 북부이탈리아에 배치되었다가 마지막 전투였던 베를린 공방전에 투입되어 포로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북아프리카전역을 제외하고는 독일이 수행했던 거의 모든 주요 전투를 돌아가며 참전함으로서 한마디로 역사의 산증인인 셈입니다. 무려 7년간의 복무동안 이렇게 온갖 격렬한 전투의 최일선에서 싸운 저자가 전쟁 끝날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책 맨앞장에 있는 저자의 이동 경로. 그야말로 유럽을 몇번 횡단한 것인지.... (사진출처 : 직접 스캔)

 

그는 복무하면서 포켓속에 넣은 작은 수첩에 하루의 일상을 기록에 남겼는데 세계 최고의 초등교육을 받은 독일군 병사들중에는 이렇게 일기나 기록을 남기는 예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20여년이 흐른후에 그때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쓴 것이죠. 그가 전문적인 작가가 아님에도 마치 한편의 대서사시같이 당시의 현장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장군들이나 아는 거시적인 전략전술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의 일상생활, 훈련, 부사관들에 의한 사적인 얼차려,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만스러움 등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자는 이것을 쓰면서 당시의 즐거웠던 기억, 괴로웠던 기억, 슬펐던 기억, 떠올리기 싫은 기억까지 기억의 단편을 하나하나 찾아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의 인물 프리츠 크뇌글라인중위의 만행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비난했다가 이것이 악연이 되어서 전쟁이 끝날때까지 따라다니며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나 자신이 풀어준 어린 아이를 뒤에서 쏘아죽인 장교의 모습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을 보면 문득 사카이 사부로의 회고록 "창공의 사무라이"가 생각납니다. 물론 서로간의 포지션도, 계급도 다르지만 어쨌든 늙은 장군들이 책상위에서 짠 작전에 따라 명령을 피동적으로 수행해야 했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둘은 흡사하죠. 사카이 사부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 부르네거 역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가까운 동료들의 죽음에는 슬퍼하면서 상층부의 무능함과 경직성에 대해서는 극도의 불만을 토로합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토텐코프사단의 전우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옹호합니다. 소수의 문제아는 있었지만 그들은 그 나름의 댓가를 받았으며 대다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싸웠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은 진실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또 그 자신이 그런 학살이나 약탈에 동참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20년이나 뒤에 쓴 회고록이기에 자신이나 자기 동료들에게 불리한 부분은 쏙 빼놓고 감상적으로 묘사했을지도 모르죠.

 

그런 민감한 부분은 책을 읽는 우리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한 병사의 시각에서 그가 겪은 전장의 참화를 이렇게 잘 묘사한 책은 여지껏 보지 못했으며 매우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정말 쉬지 않고 다 읽어버렸네요.

 

중간중간에 몇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저자의 실수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단장인 아이케는 당시 중장(우리의 소장)인데 대장으로 적혀 있고 바바롯사직후인 1941년 10월에 M3 리전차를 소련군이 쓰고 있다는 것도 좀 의문입니다. 미국의 랜드리스의 혜택을 가장 빨리 본 영국이야 1941년 7월 가자라전투에서 이미 M3 전차를 선보이고 있었으나 대소 랜드리스는 10월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때 벌써 M3 리전차가 소련군의 일선에 배치되고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IL-2 슈트로모빅은 지상공격기(급강하 폭격기)에 해당하는데 이를 "전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자체는 비교적 매끄럽습니다. 역자가 독일문학을 전공한 여성인데도 군사용어에 대해서도 그런대로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별도로 전문가에게 감수를 받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관심밖이었던 독일 병사들의 전장에서의 삶과 그들의 고뇌, 전투에서의 활약과 전장에서의 공포, 인간성의 상실 등을 잘 묘사했다는 점에서 2차대전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