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다양한 집과 간단하게 지을 수 있는 집을 소개하는 <셸터>란 책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평소 집을 지어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세계의 집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건만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살 곳을 지을 능력이 못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돈 문제는 뒤로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실용기술을 생각하니 '없다'란 답이 돌아왔다. 밥 짓는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기가 없다면 내가 생존할 확률은 0%로 떨어지리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좋아해서 자주 읽는 편인데 그때마다 오싹해하는 부분도 비슷한 맥락이다. <스탠드>나 <셀>에서는 묵시록적 상황이 펼쳐진다. 그때 살아남을 수 있고 필요한 사람은 실용기술을 가지고 있는 튼튼한 사람이다. 현대인은 잘게 쪼개진 분업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의 관계는 데면데면한데도 일에 한해서는 긴밀해져서 자신이 빵을 굽지 않아도 빵을 사 먹을 수 있고 전기 계통은 두꺼비 집만 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전기를 사용하면서 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기반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는 것은 바라지 않아도 먹을 것을 키울 줄도 모르고 기기묘묘한 직업으로 번 돈을 소비할 줄만 아는 사람들이 중세 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 <카본 다이어리 2015>는 그런 발상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발상에 긴박감과 현실감을 더하는 것은 그 모든 일들이 환경 재해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태풍이 쓸고 지나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고 강추위로 사람들이 얼어 죽는다. 여름이 되어 따뜻해졌나 했더니 이제 일사병과 물 부족으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무언가 고리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에어컨과 난방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면 현대인은 무기력하게 온갖 재해에 그대로 노출된다. 2015년의 영국, 정부는 탄소 배급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석유, 가스로 온갖 소비를 지탱해왔으나 환경 재앙이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고 그 재앙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가 내놓은 안이 제한적 탄소 사용이었다. 1인당 한 달에 쓸 수 있는 탄소량을 정해두는 것이다. 덕분에 컴퓨터와 텔레비전은 하루 2시간만 쓸 수 있고 자동차를 움직인다는 것은 무리였으며 버스를 이용하는데도 탄소 포인트가 필요했다. 심지어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는 일 조차도 말이다.

주인공이자 열여섯 살 소녀인 로라는 상황이 임시적이며 짜증난다고 생각한다. 영국이 실험용 쥐가 되겠다고 나선 거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일은 점점 안 좋게 돌아간다. 사람들은 재해나 정부가 건 규제 속에서 고통을 받고 때로 그것은 폭동으로 변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유흥을 즐기던 현대인에서 오직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비상사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전시상태 같았다. 정부의 대응은 무능했으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무력으로 진압을 하기까지 한다. 로라는 탄소 배급제란 처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지만 환경 재앙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열여섯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로라가 끊임없이 탄소 배급제가 얼마나 짜증나는지 부모님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언니인 킴이 소름끼치게 구는지를 투덜거리기 때문에 내심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나갔다. 하지만 뒤에 갈수록 상황이 처참해져서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기분이 들었다. 벗어날 길 없는 갑갑한 현실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한적 탄소 사용으로 인해서 모든 기술은 묶여 있는 느낌이었고 정부의 대응은 일방적이었으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갔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주인공 로라가 모든 일을 겪는 그 곳이 자신이 걱정 없이 살았던 런던이란 점이었다. 출구 없는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달까. 후반부에는 심지어 콜레라까지 출현하는데 현대인이 중세에 떨어진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오싹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을 보았을 때 환경만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한터라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다는 것, 생각보다 더 불안한 일이었다.

에이안,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