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 안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가려주고 세상을 우리로부터 가려주지. 그래서 안개가 끼면 모든 게 변한 것 같고 예전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거나 손을 대지 못하지.(3막, 117p)

 

메리 : (앞응접실로 향한다. 앞뜰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오자 문간에서 멈춘다. 움찔해서는) 이 소리는 분명……. (황급히 돌아와 앉는다. 잔뜩 방어하는 표징이 되며 화를 낸다.) 왜 벌써 오는 거야? 오고 싶지도 않으면서. 나도 혼자 있는 게 훨씬 나은데.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뀐다. 애절할 정도로 안도하면서 열정적이 된다.) 아, 가족들이 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너무 쓸쓸했었는데!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티론이 현관에서 불안한 목소리로 부른다.) (3막, 129p)

 

에드먼드 : 분별, 그거 있어서 뭐하게요? 어차피 우린 다 미쳤는데. (냉소적으로 다우슨의 시 「길지 않으리」를 낭송한다.생략)

               (앞을 응시하며)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하더라구요. (아버지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 조롱하듯 히죽거린다)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맞는 말이니까.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생은 고르곤 셋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과 같아요.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해버린다는 그 괴물들 말예요. 아니면 판이거나. 판을 보면 죽게 되고―영혼이 말이예요- 유령처럼 살아가게 되죠.

 

(중략)

 

에드먼드 : 취하는 게 뭐가 나빠서요? 우리 취하려고 마신 거 아녜요, 예? 아버지, 우리 피차 솔직해지자고요. 오늘 밤만은. 우린 잊고 싶은 게 있잖아요. (황급히) 하지만 그 얘긴 하지 말아요. 이제 소용없으니까.

티론 : (기운 없이)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포기하는 것뿐이지…… 또다시.(4막, 159-162p)

 

제이미 : 널 건달로 만들려고 일부러 그랬어. 내 마음의 한 부분이 그렇게 한 거야. 커다란 한 부분이. 그 한 부분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 그래서 삶을 증오하지. 내 실패를 보고 배우도록 넣나테 세상을 알게 해줬다는 거, 가끔은 나 자신도 그렇게 믿지만 그건 거짓이야.

 

(중략)

 

제이미 : 내가 너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 네가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내가 너를 망쳐놓으려고 기를 쓸 테니까. 어쩔 수가 없어. 난 자신을 증오해. 난 복수를 해야 해.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특히 너한테.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일나 시에도 뒤틀린 멍청이가 나오지. 그는 자기가 죽었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죽여야만 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나의 죽은 부분이 네 병이 낫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어쩌면 어머니가 다시 무릎을 꿇고만 것도 기뻐하고 있을지 몰라! 그는 동지를 원하지. 혼자서만 시체가 되어 집 안을 돌아다니고 싶지 않거든!(고통에 찬 냉혹한 웃음소리를 낸다) (4막, 207-208)

 

 

  (요즘 바빠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희곡집을 고른 건 조금 잘못인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현대 희곡 모음집에서 유진 오닐의 단막극을 봤다. 그땐 사실 별 임펙트가 없었다. 뱃사람들 이야기 였는데, 그냥 작가가 뱃사람이어서 쓴 거겠지 싶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진짜 이야기다. 제일 앞에 있던 아내에게 받치는 글에서 보듯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글이다. 그는 이 극을 자신이 죽고나서 이십오 년 뒤에 올려달라고 했다. 아마, 그는 이 극을 자신의 눈으로 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티론 가족의 삶은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그를 아프게 했으니 말이다. 가난하고 무식한 아일랜드계인이지만 유명한 연극배우인 아버지 제임스 티론(이하 티론)은 돈에대한 집착으로 배우 인생을 망치고 가정까지 망친다. 아이를 낳고나서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메리, 술에 절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제임스 티론 2세(이하 제이미), 시인인 둘째 에드먼드. 이건 유진 오닐의 실제 가족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다. (극의 에드먼드가 유진이다)

  이 극은 총 4막으로 이뤄져있다. 1막에서는 티론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묘사와 갈등을 증폭시킬만한 어떤 '비밀'이 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막에서는 어머니의 심각한 병세를 모든 가족이 걱정하고, 불쌍해 하면서도 서로간의 갈등을 감추지는 못한다. 3막과 4막은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 그 비밀은 죽은 유진(둘째)와 어머니 메리가 에드먼드를 낳고 나서 싸구려 의사에게서 모르핀을 처방받았고, 그 뒤로 모르핀 중독자로 살아고 있다는 이야기다. 읽으면서 이야기가 탄탄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갈등은 존재했지만, 그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티론 집의 하루를 그려내고 있는데 그 시간도 이야기의 갈등이 증폭해나아가는 시간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또한 3막까지 정확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은 것 역시 극에 호기심을 품게 만든다.

  분노로만 쓰여질 수 있었던 글을 정확하면서도, 진솔하게 그리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느끼면서 글을 써내려갔다는 게 대단하다. 난 가족극을 좋아하는데,(가장 처음 좋아했던 것도 이근삼의 <원고지>였고)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증오와 연민이라는 감정이 좋은 것 같다. 거기다 자전적인 글까지 잘 소화해냈다는 점이 좋았다. 이런 극을 보고 나면 직접 무대 올리는 상상을 하거나 보고 싶어지는데, 이 글은 차마 올리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너무 개인사적인 이야기고 비극적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