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가 소유한 삶의 공간은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자신만의 방이다. 아무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 방만은 완전히 그녀의 것이니까. 어머니의 영역은 이 집의 나머지 전부다. 모든 일을 돌보는 가정주부가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다니며 살림하는 동안에 에리카는 결코 살림으로 진을 뺄 필요는 없다. 세제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손이 망가져서는 안 되니 말이다. 어쩌다 가끔 숨돌릴 시간이 나면 어머니는 외양이 수시로 바뀌는 딸을 걱정한다. (8p)

  저녁이 되면 그 집 남편 역시 이 주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귀가하면서 산 다음날 조간신문을 읽으며 앞질러 정보를 얻으려고 할 게 뻔하다. 아이들 역시 이미 성장했고 부모와 같이 살지도 않으니까 사랑으로 요리한 점심 따위와는 무관해졌다. 이 자녀들은 오래 전에 결혼했고 그들 쪽에서도 열심히 유독성 과일들을 구매하고 있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의 무덤 앞에 서서 적당히 울고 나면, 세월이 이들에게 손을 뻗칠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이들의 자식들이 자기 부모의 걱정을 떠맡게 될 것이다. (114p)

  그녀는 외부에서 가해진 폭력적인 억압으로 자신의 책임감을 덜고 싶어한다. 누구에겐가 자신을 맡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내건 조건에 상대방이 따라야 한다.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요구한다.(258p)

  여기에 쓰여져 있는 것은 에리카가 몇 해 동안 조용히 숙고해온 결과다. 그녀는 클레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행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것들을 주장하면서도, 그가 그걸 거부하면 본질적인 사랑의 대답을 그에게 보상으로 선사할 생각이다. "사랑은 사죄하고 용서하는 거야." 그것이 에리카의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혀가 부러질 지경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하기까지 할 텐데도 클레머가 입 안에 사정하길 에리카가 당부하는 이유다. (273p)

  여자는 흔적이 남게 될 자신의 행위에 이성을 잃고 몰입한 채 목놓아 운다. 그녀는 완전히 혼자다. 다양한 빛깔의 플라스틱 꼭지를 가진 핀침으로 자신을 찌르는데, 침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자기 머리 색깔을 가지고 있다. 침의 대부분은 금방 다시 빠져 밑으로 떨어진다. 손톱 밑을 찌르는 일만큼은 아파서 감히 하지 못한다. 볼록하고 작은 핏방울들이 곧 그녀의 살갗을 뒤덮는다. 여자는 완전히 혼자인 체로 격렬하게 흐느껴 운다. (305p)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영화로 먼저 본 것이다. 그 전부터 책을 보고 싶었는데, 영화를 먼저 접할 기회가 닿아서 보게 되었다. 사실 그래서 읽기 전에 혹여나 영화의 인물들이 그려질까 걱정했는데, (이자벨 위페르가 너무 강렬했다) 다행히 소설 특유의 문체가 강해서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렇다하더라도 표정을 상상할 땐 이자벨 위페르의 얼굴을 생각했다. 클레머 역할의 소년은 다행히 기억나지 않았다) 
   이 책의 문체는 단호하고 서늘하며 빠르다. 에리카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쉴세없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어떤 감정도 없이 서술한다. 첫부분에서 조금 읽기 힘들었던 건 에리카가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올 때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오는데, 비유가 많은데 낯설고, 어떤 인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서 적응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낯설음이 새롭게 느껴지고, 아주 틀린말로 들리지 않았다. 
  에리카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 어머니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딸이 자기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에리카가 남자와 혹은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너는 특별하다는, 달콤한 칭찬으로. 에리카의 세계는 학원과 집 밖에 없다. 소설은 보통 에리카의 집이 주 무대가 된다. (모든 갈등이 이 집에 일어난다) 그녀는 여자로서의 삶을 어머니로부터 거세 당하고 산다. 제대로된 사랑을 모르며, 나이가 꾀 들었음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그저 경제적인 책임에서만 어른이 된 것이다. (그녀는 어린 제자인 클레머보다도 어린 것 같다)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는데, 그녀의 이상행동이나, 사랑을 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지배받고 있지만, 힘으로는 어머니를 지배하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랑은 이게 전부다. 그래서 클레머에게 지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배하려고 드는 것이다. 
  책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어머니와 에리카가 한 침대에서 자는 장면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부부 같다.(책에도 이런 묘사가 나온다) 에리카는 여성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남성적 자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는 여성이고, 아무리 남성처럼 포르노를 봐도 여성적인 애정을 원하게 된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 복잡한 갈등을 작가는 잘 풀어가는데, 감탄했다. 언젠가는 에리카 같은 여자의 삶을 그려보고 싶다. 

  
+<블랙스완>을 보면서 <피아니스트>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