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자기를 여기로 데려온 피어스는 결국 자신을 구하지 못한 것이며, 처음부터 탈출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과연 그녀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가? 그녀같이 생각할 시간이 많은 갇혀 있는 여인들이란, 자신이 갇힌 탑의 높이와 구조가 자신의 자아와 같아 보이는 것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현재 자기를 가두고 있는 것은 이유도 없이 외부에서 찾아온 알 수 없는 고약한 마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성적인 영민함과 두려움을 제외하고는 이 형체 없는 마술을 조사해 볼 어떠한 수단도, 이 마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힘은 또 얼마나 강하고 센지 이해하거나 측정할 어떠한 방법도 그녀에겐 없었다. 다만 미신에 의존하거나 수놓기 같은 유용한 취미를 갖거나 미쳐 버리거나 아니면 디스크자키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탑이 어디에나 있다면, 그리고 구원의 기사가 그 마술을 풀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24p)

 

  그러나 이 밤의 어떤 것도 그녀에게 와 닿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다만 그 상징들의 반복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어떤 심리적인 외상을 동반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외상을 희석하거나 그녀의 기억에서 아주 느슨하게 풀어 버릴 수도 있으므로. 그녀는 기억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나 동물원에서 짐승에게 먹이를 줄 때, 높은 발코니에서 장난감 같은 거리를 내려다보았을 때 느끼는 것처럼, 지금 그녀는 어떤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즉 미미한 몸짓으로도 실현할 수 있는 죽음의 충동 말이다. 그 유혹에 복종하기만 하면 그것은 꿈보다 더 아름답게 펼쳐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디파는 그 육감적인 영역의 가장자리를 건드려 보았다. 중력의 끌어당기는 힘, 야생의 강탈, 탄도학의 법칙도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약속해 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한이라도 난 듯 몸을 심하게 떨며 시험해 보았다. "나는 기억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거야. 나에게 다가오는 단서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명료함과 영속성이 있을 거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을 거야." 그러나 곧 그 보석과도 같은 단서들이 단지 하나의 보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녀에게 간질병처럼 직접적으로 미리 전조를 알려 주는 '말씀', 밤을 파괴할 수도 있는 그 절규를 상실한 데 대한 보상 말이다. (153p)

 

  "그 환상을 소중히 간직해요." 힐리어스가 격렬하게 외쳤다. "달리 당신이 가진 게 없지 않소? 환상의 작은 촉수를 꼭 움켜잡아요.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당신을 꾀어 그것을 없애 버리거나 약사들이 독약으로 그것을 제거하게 하지 말아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소중히 간직해요. 왜냐하면 그것을 잃어버릴 때 당신은 그만큼 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 쉬우니까 말이오. 당신은 그 순간부터 아마 존재하지 않게 될 거요."

  "들어와서 도와줘요." 에디파가 고함을 쳤다.

  힐리어스의 눈에선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왜 쏘지 않는 거요?"(183-184p)

 《제 49호 품목의 경매》, 토마스 핀천

 

  읽으면서 조금 힘들었다. 가장 문제는 긴 문장이었다. 저번에  (다른책이지만)원서를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수식이 너무 많아서 문장의 처음과 끝을 따라가기 어렵게 느껴지는 게 영어 문장이었다. 아마 그런 문장 탓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분위기였고, 내게는 맞지 않는 문체에, 나는 모르는 미국 문화가 생소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그때의 문화에 대해서 줄줄이 나오는데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각주에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특히 각주를 읽다보면 글의 흐름이 깨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 글의 묘미인 '단어'의 의미는, 영어를 잘 해야지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정말 요즘 여러가지로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는 때가 많다) 고로 나는 대부분 눈치채지도 못했고, 더불어 감탄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읽으면서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죽은 전 남자친구의 유산 관리인이 된 에디파가 그가 숨겨놓았던 비밀을 추적해가는 이야기다. 그것을 추적해가는 이야기는 여느 헐리웃 영화를 한 편 보는 것만큼이나 스캐일이 크다. 어쩐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생각났는데, 실로 토마스 핀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알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들을 모두 믿을 수 없다는 것과, 엔트로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엔트로피는 과학 용어로, 외부 세계와 교류하지 않는 닫힌 체계는 모든 것이 돌질화되어 운동이 정지되고 결국 파멸할 것이라고 문학적으로 쓰인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세계처럼 말하는 미국에서 소외 당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들은 번쩍번쩍한 사회 속에 차라리 스스로 고립되어 들어간다. 주인공 에디파 주변의 남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파멸해간다. 그리고 에디파는 이 전에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오던 삶 대신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에 혼자가 되는데, 그 장면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열린 느낌이었다. 소설은 이러한 부분에서 끝이 난다. 결국에 어떻게 된다는 완결도 없이. 그러나 그것 자체로 엄청난 임팩트를 준다. 마치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 영화가 끝이나고 페이드 아웃이 되는 듯 했으니 말이다.

  조금 더 내가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싶었다. 많은 걸 이해하지 못해도, 분명 스토리 하나만으로도 재밌는 소설이었다. 또한 읽으면서 이 소설이 과거도, 현재도 아닌 어떤 미래에서 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