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하지만 난 너를 책망하거나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려고 여기 온 건 아니야. 너 좋을 대로 해. 단 부탁이 있어. 이 책 바깥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 언젠가,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 아이들을 갖게 될 거야. 내 아이들이 엄마가 부정하고 잔인하고 영웅을 모욕한 여자로 나오는 책을 보게 되는 건 싫어. 샐,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날 이 소설에서 제발 빼줘. 이 책을 나 없이 다시 시작해.

씨발년. (186-187p)

여러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사람들이 너를 안다고 하더라. 나도 알고 있다는 거야. 그이들 말로는 161페이지에서부터 나를 알게 되었대. 그들한테 난 꿀벌이고 네가 추울 때 잠자리 해주는 상대더라. 또 자포자기에 빠져 비데 위에 걸터앉은 찐드기 같은 여자고, 우리가 섹스를 한 방식이며 체위까지 다 알고 있더라고. 아직 나를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내 거기 감촉까지 안다는 거야. 네가 나랑 잔 것으로 충분치 않아서 남들한테 떠벌린 모양이지. 네 허구와 상상의 세계에서는 넌 원하는 상대라면 누구하고든 잘 수 있어. 자위를 해도 좋고. 하지만 난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이건 예의가 아니야, 샐. 자고 나서 그 얘기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일을 글로 쓰는 건-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고 이어지게 한다면……

마지막 장은 이러했다.

나랑 마주친 사람들은 나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네가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고 막가는 애인지는 전혀 모르더라. 물건이 항상 포피에 싸인 채로 섹스한다는 것이며, 내가 살갗을 끌어내려 너한테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기 페니스를 제대로 본 적도 없다는 것도 모르던데. 너의 가톨릭교도답고 정숙한 정상위도 말이야. 섹스하는 방법은 다른 것도 있는데, 샐. 내가 너한테 그걸 보여줬어야 했어. 그 얘기도 쓰렴. 네 잘난 미국 소설에 넣으란 말이야. 네가 불이 슬픔을 사라지게 해줄 거라 믿고 네 몸을 지진 날 얘기도 써야지. 내가 너를 깨끗이 닦고 거즈를 붙여주었잖아. "넌 정말 착하고 친절해." 그때 네가 나한테 그랬지. "나랑 결혼해야 할 상대는 너인지도 몰라." 됐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나였어. (291p)

《종이로 만든 사람들》, 살바도르 플라센시아

책을 산 건 고등학교 때였다. 그러나 일장 정도 읽고 나서 책을 덮어놨다. 책의 큰 부피 때문에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사실 잘 읽히지 않았다. 책 안에 구멍이 뚫리거나 글씨체가 바뀌거나 검게 가려진 것이 신기해서 샀을 뿐이었다. 건조한 문체는 잘 읽히지 않는다. 이게 단지 번역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지러운 구성을 따라가는 것도 버겁다. 이것도 겨우 읽은 것이다. 근 일주일에 걸쳐서 읽었다.

소설은 기존의 소설과는 다르다, 고 소개 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보통의 소설과 같다.

'글을 쓰는 동안 이 소설이 장차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저 스스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거짓으로 가득한 실화입니다.'

작가는 마치 뭐 새로운 것이라도 발견 된 것처럼 인터뷰를 했지만, 소설이라는 특성 자체가 원래 '거짓으로 가득한 실화' 아닌가.

이 소설 속에는 작가가 사는 세계와 소설 속 세계와 독자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을 소설 속으로 모두 들어내놓고 있다. 서문에서 1까지는 조금 지루했지만, '2'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부터는 조금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세계를 다 보여주고 '3'으로 간다는 것이 지루했다. 이 소설은 소설 속 인물들이 '토성'과 싸우는데, 여기서 '토성'의 존재는 작가다. 소설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토성'으로 끝나고 '3'에서부터는 어떤 상징도,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지루해진다. 소설은 맥을 잃고 '3'부터는 근근히 끝을 향해 달려간다. 지루하다.

예전에는 이런 기교들이 신기하고, 좋아보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그저 '기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가 이야기를 쓰게 해줄게. 네 역사를 본 대로 풀어봐. 난 인정머리 없고 경박한 여자니까 너한테 무슨 소리를 들어도 싸지. 하지만 이건 소설이야. 더 이상 너와 나 사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너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세상일을 너무 많이 끌어넣었어.'(184P)

소설 속 말에 깊히 동감하는 바이다. 정말 이건 소설이라고!

그리고 내가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나도 그런 식으로 쓰니까. 근데 이 책에서는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래서 안 쓸 것도 아니며, 미안해 할 것도 아니잖아. 이건 작가 스스로 즐기기 위해 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