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남고 말은 흐른다는 격언은 말이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에 비해 글이 항구적이며 죽어 있다는 의미인 것. 반면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즉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다.” 이는 작가 보르헤스의 말이다. 세계적 지휘자겸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 ~)과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사유의 거장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 ~ 2003)의 대담집인 ‘평행과 역설(Parallels & paradoxes)’을 읽으며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린 것은 말이 흐르는 것 즉 빠르고 신성한 것이듯 음악 역시 그렇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음악의 시간적 특성(흘러가 버리는)에 대해 사이드는 언어와 음악은 終局에는 사라져 버리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시간 속에서 具顯되는 존재들이라 표현한다. 반면 바렌보임은 음악의 공간적 특성(어떤 음들은 눈 앞에 있는 듯 느껴지고 어떤 음들은 멀리 있는 듯 느껴지는)을 말한다. 깊은 사유 속에 평행과 역설을 보여주는 두 거장의 대담은 명불허전이다.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닮은 점이 많다. 바렌보임은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유대인이고 사이드는 이스라엘의 점령을 피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팔레스타인인이다. 두 거장은 또한 특정한 지리적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았고 삶을 흐르는 것으로 여기는 등 다양한 정체성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의 그런 특성들은 망명 체험과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이 말은 빅토르 위고가 한 말로 사이드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의 말미에 인용되었다. 위고의 말은 사이드의 모토이기도 한 셈이다. 바렌보임이 세계적인 화제 메이커가 되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국민으로 이스라엘의 對 팔레스타인 외교 정책을 맹렬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에서 금지되었던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 연주가 금지된 것은 바그너가 반유태주의자였고 히틀러가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기 때문이다.(히틀러는 바그너와 베토벤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1872년 이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연주된 유일한 非 바그너 곡이다.) 바그너는 작곡가이자 대본 작가, 비평가이자 반 유대적 정치 논객이었다.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대화는 말 그대로 성찬(盛饌)이다.(지난 1995년과 2000년의 대담이 ‘평행과 역설’의 주요 부분이다.) 바렌보임은 음악에서의 민족주의적 경향 예컨대 아리아족만이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문제삼았다. 바렌보임은 독일 음악에 대해 오직 독일인만이 그것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파시즘이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사이드는 정체성 그 자체는 매우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는 말로 깊은 사유를 견인한다.  

바렌보임과 달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이드는 역사는 많은 토론으로 풀어야 하는 大 사안이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음악은 미술, 사진, 연극, 춤 등에 정통한 사람조차 쉽게 말할 수 없는 장르임에도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통합되어 그 어떤 예술보다 강력하고 필연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역설적인 특성을 지녔다고 정의했다. 음악은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삶에 관해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바렌보임의 규정 역시 사이드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바렌보임은 음악은 환영(幻影)을 만드는 기술이라 거듭 말한다. 바렌보임이 내린 소나타 양식에 대한 정의(定議 - 긴장과 갈등, 발전의 형식)를 비롯해 ‘역설과 평행‘이 독자에게 주는 풍부한 지식에 근거한 감동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특정 화음에 비중을 두는 조성 체계의 분열과 교회의 시대(神을 떠받들던 시대)의 소멸이 상관적이라는 바렌보임의 지적이 그렇다. 바렌보임에게 음악은 고정된 정체성을 풀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는 장르이다. 제 2 빈 악파의 무조(無調) 음악을 실향 또는 영원한 유배에 비유하는 사이드의 음악관은 톡특하다. 사이드에게 그들의 음악은 망명자의 음악이다.  

짧은 음표는 이른 죽음의 은유로, 긴 음표는 죽음에 대한 저항과 영원에 대한 동경, 변하기 쉬운 삶과 자연에 대한 투쟁의 은유로 규정하는 바렌보임 역시 독특하다. 사이드는 스승으로서 최선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자신을 비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 말한다. 스승 또는 거장의 권위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는 의미이다. 사이드는 정보가 아닌 교육, 생각하는 방법을 제공하려 애쓴 스승이었다. 사람들을 그저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글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불편함을 주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고 특정한 진부한 표현들을 없애버리길 원한다는 사이드의 정체성은 많은 생각 거리를 안겨준다.  

물론 나는 작곡가의 정치적 이력과 분리해서 들어야 할 만큼 바그너의 음악이 미학적이고 예술적인지 알지 못한다. 사이드가 오늘날 점점 난해해지는 음악(현대음악)을 음악과 사회가 분리(자폐적?)되는 현상으로 보는 것과 달리 바렌보임은 오늘날 과거의 음악이 얼마나 참신했는지 깨닫기 위해서라도 동시대 음악과의 교류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작품이 있으면 끊임없이 듣고 또 들으며 반복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바렌보임에게 사이드는 오늘날 음악이 사회에 저항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음악과 사회의 분리를 우려하는 사이드는 예상대로 공통된 담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현상을 지적한다.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동조(同調)하는 한편 상반된 견해를 보인다. 바렌보임이 베토벤의 작품이 남성성과 여성성 등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상반된 요소의 대립을 담고 있기에 긍정적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적(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말하자 사이드는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이드는 타자를 동화시키려고만 하는 경향과 무조건 배척하려는 경향 사이에 중재가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진정으로 우려한다.(흥미로운 것은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만, 브람스, 바그너 등과 달리 바흐의 음악에는 남성적 성격과 여성적 성격 등의 대립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바흐의 음악을 심심하거나 덤덤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강숙 지음 ‘음악의 이해’ 224, 225 페이지) 인문학의 사명은 동화나 배제를 의도하지 않고 서로 다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라는 사이드의 지적은 내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로 읽힌다.  

사이드는 바렌보임과 바그너에 대한 금기라는 글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의 트라우마로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진정 고통스런 일이 될지라도 바렌보임의 연주는 단순한 애도에서 한 단계 나아가 삶 그 자체를 살아가도록 한다는 말로 바렌보임의 바그너 연주를 긍정한다. '평행과 역설'을 통해 나는 두 거장의 총체적 시각과 삶에 대한 긍정을 느꼈다. 바렌보임 단독의 미학적이고 분석적인 음악론이 출간된다면 좋겠다는 생각과 백혈병으로 타계(2003년)한 사이드에 대한 애도를 함께 표한다. '평행과 역설'은 음악적 특성과 정치적 특성을 인문학적 개념들에 총체적으로 담아낸 명저이다.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